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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옥獄에 들어갔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턱에서…
인천 옥獄에 들어갔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턱에서…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백범 김구의 어린 시절부터 동학에 입문해서 의병 활동을 하던 청년기, 일제 강점기 시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해방을 거쳐 조국에 돌아와 활동한 행적까지 파란만장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삶 속에는 일제 강점기였던 우리나라 근대의 모습이 보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활약도 담겨 있다. 이 일지 곳곳에 ‘인천’이 언급됐다. 인천은 청년 김창수가 독립운동가 김구로 재탄생하는 데 많은 자양분을 제공했다. ‘국사원판’ ‘백범일지’와 도진순 주해본 ‘백범일지’를 참고한 나남출판사에서 2002년 발행한 백범일지(학술원판)에 나온 ‘인천’을 부분 발췌했다.
발췌 정리 유동현 본지 편집장
독립운동의 증언서이자 유서
일지는 백범 김구가 만리타향에서 변변한 자료 하나없이, 자신과 어머니의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수고(手稿)이다. 1947년 12월 15일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아들 김신이 펴낸 초판본을 필두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10여 본이 각 출판사에 의해 중간됐다. 백범일지는 전기문학의 현대적 고전으로 독립운동의 증언서다. 중국 상하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지내오며 틈틈이 써놓은 이 책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보존되어 있던 친필본을 김지림이 윤문해 간행됐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어 유서 대신,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기록한 만큼 비장감이 넘치는 감동을 준다.
상편은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머리말을 1929년 5월 3일 상해에서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권은 백범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 곧 이봉창 의사의 1·8일왕 저격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4·29상해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처로 표류하다가 충칭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한 것으로서 칠순을 앞둔 망명가의 회고기록이 되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써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넣었다.
나는 완전한 우리의 독립국가가 선 뒤에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추이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어놓게 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우리 젊은 남자와 여자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거니와 그와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에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단군기원 4280년 11월 15일 개천절날)
- ‘저자의 말’ 중에서 부분 발췌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 지대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까닭은 갑오경장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으로 경무청, 오른편으로 순검청이 있었다. 순검청 앞으로 감옥이 있고 그 앞에 노상을 통제하는 이층 문루가 있다.’
- 첫 번째 투옥, 수감 생활 중
‘어머님은 비록 저 아래 농촌에서 생장하셨지만 모든 일을 잘 감당하셨다. 특히 바느질에 능하셨는데, 무슨 일이 손에 잡혔을까만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감리서 삼문 밖 개성사람 박영문의 집에 들어가서 일의 자초지종을 잠시 이야기하고 그 집 동자꾼으로 써달라고 청하셨다. 그 집은 당시 항내에 유명한 물상객주로서 밥짓고 바느질하는 일이 무척 많았다. 덕분에 하루 세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주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 곽낙원 여사의 아들 옥바라지 상황
‘이 항구는 가장 먼저 열렸기 때문에 구미 각국인이 와서 살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자들도 있었으며 여러 종교의 교당도 세워져 있었다. 또 우리 사람으로 더러 외국에 장사하러 다녀와 신문화의 취미를 아는 자도 조금은 있던 때다.’
- 옥중에서 신서적 탐독
‘인천옥에서 사형수 집행은 늘 오후에 끌고 나가 우각동에서 목을 매달았다.
- 우각동은 현재의 동구 금곡동 일대
‘기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경성부 안은 그 전화라는 것이 가설된 지 오래였으나 경성 이외에는 장거리 전화가 인천까지가 처음이요, 그때는 인천까지의 전화가설공사가 완료된 지 사흘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이었다. 만일 전화 공사가 준공되지 못하였다면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감리서에서 내려온 주사는 이런 말을 했다.
‘“인천항 내 32명 객주들이 통문을 돌려서 매호에 한 사람 이상 우각동에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모아서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32명 객주가 담당하여 김창수를 살리자고 작정했었소. 아무러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 인천~경성 간 전화 가설로 사형 집행 정지 상황
‘탄탄대로로 나왔다. 봄날의 밤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인천은 몇 해 전 서울구경을 왔을 때 한 번 지나쳤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밤새도록 바닷가 모래밭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턱에 와 있었다.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이리라 짐작하고 걸어갔다.’
- 탈옥 후 인천에서의 도주로 찾기.
천주교당은 지금의 답동성당
‘그 사람은 반가이 승낙하고는 이 골목 저 골목 후미진 길로만 해서 화개동 마루턱까지 동행해 주었다. 거기 올라 동쪽을 가리키며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 탈옥 후, 도주로를 서울로
‘인천항 5리 밖에 이르니 아침 해가 떠올랐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는 호각소리요 부근 산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희끗희끗하였다.'
- 탈주로 찾기 상황
‘밤에 탈옥하느라 힘을 썼고 밤새껏 북성고지 모래밭을 헤맨 후 다시 황혼이 되도록 물 한 모금 못 먹었으니 하늘과 땅이 핑핑 돌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북성고지는 현 인천역 부근 추정
‘새벽 일찍 깨어 좁은 길을 골라서 서울로 향했다. 벼리고개를 향하여 걸어가다가 어느 집 문 앞에 다다라 아침밥을 걸식했다.’
- 벼리고개는 부평구 일신동 별리교개(별리현)
‘나는 잔여 형기의 2년을 채 못 남기고 서대문감옥을 떠나 인천으로 이감케 되었다. 원인은 내가 제2과장 왜놈과 싸움한 사실이 있는데, 그놈이 비교적 고역이 심한 인천 축항공사를 시키는 곳으로 보낸 것이다.’
- 신민회 사건으로 두 번째 인천감옥 생활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턱에서 옥중에 갇힌 불효한 나를 보시느라 달마다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용동 마루턱은 현재 내리교회 부근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항구 건설 공사장으로 출역을 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열 길 높이의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렸다.’
- 축항(도크) 건설 강제 노역 동원
‘감옥 문밖으로 항구 공사장에 드나들 때 왼쪽 첫 집은 박영문의 물상객주 집이다. 왼쪽 맞은편 집은 그 역시 물상객주인 안호연 집인데 안 씨 역시 나에게나 부모님에게 극진한 정성과 힘을 다 쏟던 노인이었다.’
- 백범 김구 부모를 도운 인천 객주 사람들
‘6, 7월 더위가 심한 어느 날 갑자기 수인 전부를 교회당에 모아서 나도 가서 앉았다.'
- 교회당은 내리교회로 추측
‘이튿날 아침 전화국에 가서 안악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를 불렀다.’
- 현 중동우체국 내 전화 시설
‘비단 서울만이 아니었다. 인천·개성 등 지방 각지에서 임시정부 환영회를 일제히 거행하였다.’
- 광복 후 임시정부 환국 환영
‘그럭저럭 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38선 이남이나마 지방 순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 1차로 인천을 순시하니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라, 이미 쓴 이야기들을 대강 다시 음미하게 된다.
스물 두 살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 때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때에는 17년 징역을 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하게 되었다. 17년 전에 탈옥하였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의구하게 나를 맞아주나 17년 전 김창수는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또한 기나긴 세월이 흐른 까닭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곳에 구속된 몸으로 징역살이를 축항공사로 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땀이 젖어 있는 듯하고, 구속된 이 몸을 면회하러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의 기억이 새롭고 감개무량했다.
감회를 금하지 못하는 중에 인천 순시는 대환영리에 마치고 제 2차로 공주 마곡사를 시찰키 위하여 공주에 도착했다.’
- 광복 후 38선 이남 순회 중 인천 관련 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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