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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퍼 올릴 두레박 품고 떠나다

2018-03-28 2018년 4월호



희망 퍼 올릴 두레박 품고 떠나다

터의 무늬가 다시 한 번 바뀐다. ‘열우물 마을’이라 불리는 십정동, 그 터의 무늬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인천의 끝 땅으로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던 북망산에 6·25 전쟁 후 피란민이 들어와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쳤다. 이후 도심에서 쫓겨 온 철거민들이 언덕 기슭에 판잣집과 흙벽돌집을 짓고 솥단지를 걸었다. 인근 염전이 거대한 공단으로 조성되면서 전국 팔도에서 온 노동자들은 산꼭대기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은 인천의 대표적인 산동네, 달동네가 되었다. 시간의 켜가 층층이 쌓인 그 동네는 지금 빈 둥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떠났다. 열우물에서 퍼 올렸던 희망의 두레박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떠났다. 이제 그 터에는 새로운 무늬가 그려진다.
 
사진 ·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1948년 함봉산에서 수봉산 방향으로 찍은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국유지 야산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던 이 마을의 모습은 1960년대 후반 철거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틀이 잡혔다. 도화동과 율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들어왔다.
선인학원은 1964년부터 남구 도화동 대지 53만㎡(16만평)에 무자비한 불도저를 앞세워 거대한 상아탑을 세웠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졸지에 ‘철거민’이 돼 십정동으로 이주했다.
서럽고 지겨울 법도 한데 자신들이 모여 살게 된 곳을 ‘도화촌’이라 불렀다. 1967년 들어 한 무리의 이주민들이
다시 이곳에 짐 보따리를 푼다.
서구 율도에 인천화력발전소가 조성되면서 쫓겨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도촌’이라 불린 집단 거주지를 마련한다.


2006년



2017년


앞집의 어깨를 짚고 다른 집이 올라섰다. 이웃과 내 집을 나눌 담은 없다.
담을 칠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산 모양을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집들이 들어섰다. 그렇게 산동네가 되었다. 식구가 늘어도 집터를 한 뼘도 늘릴 수가 없었다.
집 위에 쪽방을 올렸다. 애초에 무허가이니 무단으로 방을 냈다. 사다리를 만들어 지붕 한 귀퉁이에 장독대와 텃밭을 만들었다.
십정동에는 건축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형적 주택이 즐비했다.


2008년


2011년


사람이 모여 사니 작은 시장이 생겼다. 산 아래로 난 길 양쪽으로 2층 상가가 뻗어 있었고 그곳에 약국, 정육점, 비디오 가게, 목욕탕, 방앗간, 빵집 등이 들어섰고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매년 시장 공터에서는 열우물 마을 축제가 열렸고 마을 입구에 낮이면 일 나간 부모들을 대신해서 아이들을 돌보는 ‘해님공부방’이 문을 열었다.
10여 년 전부터 개발 소식이 들렸다. 모조리 헐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은 집에 대한 더 이상의 투자를 하지 않았다. 새면 새는 대로 비면 비는 대로 그대로 놔뒀다.
동네가 급속히 늙어갔다. 허물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2013년


2009년

 
2014년 이미 전체 1,488 가구 중 60%가 빈집이었다.
얼마 전 우여곡절 끝에 십정2구역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첫 삽을 떴다.
19만2,687㎡ 규모에 총사업비 1조1,621억 원이 투입돼 2021년 완공될 계획이다.
이곳에 5,678가구, 1만4,000여 명이 입주한다. 십정2구역은 예전의 철거 후 재개발 방식에 도시재생 뉴딜이 접목된 새로운 형태의 주거복지 공간이다.
 
열우물에서 다시 희망의 두레박질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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