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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세기에서 이십일 세기까지, 그 남자의 시간

2018-08-31 2018년 9월호



이십 세기에서 이십일 세기까지,

그 남자의 시간

 

때론 오래된 것이 더 새롭고 아름답다. 인천은 과거와 미래가 조화로운 도시, 최초와 최고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간의 흔적을 보듬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시간이 고인 동네 배다리, 그 골목 한편엔 아버지가 전쟁 속에서도 지켜낸
‘이십 세기’ 약방의 역사를 ‘이십일 세기’인 오늘 꿋꿋이 이어가는 아들이 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포화 속에서 살아남다

“‘이십세기약방’. 무슨 뜻이지?” 1950년 5월, 동구 배다리에 신기한 이름을 한 약방이 문을 열었다. 앞서도 너무 앞섰다. 당시만 해도 생소해서 그 뜻을 쉽사리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별나게 붙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힘 안 들이고 가게를 알리지. 사람들이 이십 세기란 말을 잘 몰랐어. 이 길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신기해 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줬지.”
1950년 5월 1일, 이종현(90) 어르신은 스물세 살 나이에 동구 배다리에 이십세기약방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가게 문을 연 지 두 달이 채 안 돼서 전쟁이 났다. 짐을 챙길 새도 없이 부랴부랴 고향 신천리로 피란을 갔다. 훗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돌아와 보니, 약이란 약은 깡그리 쓸어가 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다 1·4후퇴 때 팔미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내려갔다. 이번엔 이천전기 변전소 사택에 사는 형님 댁에 약을 숨겨두었다. 일본식 집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다미를 들어내니 다행히 약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다시 시작했다.



1950년 5월, 역사를 시작한 아버지의 약방은
2017년 4월, 아들의 한의원으로 새 숨을 텄다.



1959년, 이십세기약방 앞에서 박문여고 학생들
(사진 제공 '인천이야기발전소)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 아버지의 건강을 살피는 맏아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말간 웃음이 번진다.



오직, 자식들 잘 키우기 위해

이십세기약방은, 전쟁의 역사 한가운데를 지나 1990년대 말까지 배다리 골목 한편을 지켰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시대의 변화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길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긴 세월 호황을 누렸다.
“당시 ‘약을 구하려면, 배다리 이십세기약방으로 가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멀리 부평, 김포에서도 찾아왔지요. 의사들까지 우리 집에서 약을 사 갔습니다.” 아들 이철완(62) 씨가 좋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당시 인천에는 스무 개 정도의 약방이 있었다. 대부분 손님이 많이 찾는 약들만 구비해 두었는데, 이종현 어르신은 달랐다. 막무가내로 쓸어 모아 창고 그득 쌓아놓았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이 방식은 통했다. 뒤편에 있는 집 두 채를 사서 창고 건물로 쓸 만큼 가게 몸집이 커졌다. “2층 창고를 4칸으로 나눠 4명이 약을 관리했어요. 주문이 들어오면 약을 찾아서 배달하는 사람에게 건넸지요. 한창 때는 직원이 4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 가게 문을 열어 오후 10시가 넘어서까지 손님을 받았다. 가게 문을 닫은 후에도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장부에 숫자를 빼곡히 써 내려갔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힘닿는 데까지 일했다. 아들 둘 딸 셋, 자식들 잘 가르치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약방집 아들은 국민 영양제 ‘원기소’를 친구들에게 선심 쓰고, 소풍 가는 날이면 선생님들에게 폼 나게 ‘박카스’를 돌렸다. 당시 이 음료수 한 병의 가격은 짜장면 한 그릇과 맞먹었다. 담임선생님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했다.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한의대에 들어가고 대학 교수까지 됐다. 한국노인병연구소 소장이라는 어엿한 직함도 달았다. 아버지와 그의 곁에서 묵묵히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기에 가능했다.




10년째 비어 있던 창고 건물은
근사한 정원이 됐다.(위)
약방이 리모델링되고, 아버지는 감회에 젖어 두 시간이나 공간을 둘러보셨다.




이 집 지하엔, 전쟁의 흔적인
방공호가 남아 있다.
신기해 하니, “그 시절엔 당연한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아래)


추억 위에 살다

올해로 아버지는 아흔이 됐다. “네가 오랜 세월 노인병을 연구해 왔는데, 정작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생전 자식에게 바라는 것 없던 아버지가 어느 날 맏아들에게 문제를 던졌다. 번뜩 정신이 났다. 죄송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곁에서 지켜드리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 길로 곧장 아버지의 평생 일터이자 가족이 살 부비며 살았던 고향집으로 왔다. 추억을 짓고 기억을 세웠다. 70여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약방 간판은 건물 정면에 그대로 두고, ‘초록한의원’ 간판을 작게 옆 벽면에 걸었다.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오리지널’이 이십세기약방이잖아요.”
 
민트색 타일을 정갈하게 쌓아올린 2층 건물은, 세월을 입으면서 일부 덧대고 기웠을 뿐 1959년 모습 그대로다. 당시 배다리에서 보기 드문 현대식 건축이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1966년에 지은 창고는, 1970년대 후반 일부를 개조해 살림집으로 쓰다 근사한 정원으로 다시 꾸몄다. 미닫이 거실 문, 나무 창살, 붉은 벽돌 벽, 가문의 역사를 받들고 있는 대들보…. 숨을 이을 수 있는 건 모두 살렸다. 어머니가 아끼시던 자개장은 방문으로, 달빛 아래 졸린 눈을 부비며 두드리시던 다듬잇돌은 발 디딤대가 됐다.
“난 추억 위를 걸어 다녀요.” 1956년, 이 집에서 태어났다. 검진실은 부모님께서 쓰시던 안방이고 접수실 쪽은 형제 누이들 방이었다. 머물수록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고향 배다리에 대한 마음도 각별해만 간다. 어릴 땐, 키가 자라는 만큼 마을도 함께 커갔다. 하지만 머리 희끗해져 돌아와 보니 동네가 나이 들고 초라해져 서글픈 마음이 인다.
“원도심이 허물어지는 순간 역사도 사라집니다.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지켜야 해요. 사라진 후에 후회한들 아무 소용 없습니다.”
 
다행히 아직, 배다리에선 낡고 오래된 것들이 나름의 이야기를 지킨다. 이십 세기에서 이십일 세기까지, 이곳의 시간 역시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다만 시간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씨 가문의 역사를 받들고 있는 대들보.







약방집 맏아들은 한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평생 일터이자 가족이 살 부비며 살던 집에
추억을 짓고 기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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