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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해처럼 솟구친 노동자의 힘

2018-08-31 2018년 9월호


솟아오른 해처럼

솟구친

노동자의 힘

 
인천의 문학은 시대를 관통해 왔다.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 한국전쟁, 산업화… 질곡의 역사 한가운데서 파이고 덧대며 단단해진 땅,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지켜보던 바다. 전쟁으로 떠밀려온 피란민과 먹고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뒤엉킨 삶. 이 모든 것이 인천의 문학적 서사를 형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강경애의 소설 ‘인간 문제’는 1930년대 인천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시대의 아픈 현실을 꿰뚫고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다. 그는 한때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 삶을 자산으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끌어안았다.
돈을 벌기 위해 평생 공장 노동자의 삶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 흔적을 따라 걷는 길, 그들이 흘린 땀과 삶을 위한 외침이 아직 맴도는 듯하다. 인천도시지원디자인연구소 장회숙 선생과 인천문화관광해설사 김인수, 송미영 선생이 그 길을 함께했다.
 
도움·감수 장회숙 인천도시지원디자인연구소 소장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 운동이, 인천에서 일어났다.
1890년대 두량군(斗量軍)들이 파업을 하던 인천항 야적장 ‘칠통마당’의 현재 모습.
앞에 보이는 건물이 옛 일본우선주식회사다. 현재 남은 건물은 1888년 신축한 것으로,
아픈 역사를 걷어 내고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 갯벌을 메운 자리에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들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필요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땅. 대한제분, 대성목재, 동양방적(동일방직), 대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 한국유리, 이천전기(일진전기), 동국제강, 인천제철(현대제철)이 바닷가를 둘러싸며 거대한 산업 벨트를 이루었다. 그 안엔 가난 속에서 먹고살아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가 있었다. 너도나도 힘들던 시절, 공장지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희망의 상징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친 그 치열한 삶은, 인천을 한국 노동 문학의 중심에 서게 했다. 대표적인 근대 문학 작품인 강경애의 ‘인간 문제’는, 인천을 배경으로 식민지 시대의 궁핍한 현실을 증언하고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다.




소설가 강경애(1907~1943)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인간 문제’는 노동자의 아픈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근대소설이다.
한때 인천에서 품팔이로 근근히
살아가던 삶을 자산으로 썼다.



긴담모퉁이길은 1907년, 홍예문을 만든 공병대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과 통하는 길로,
일본인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 정미소로 향하는 노동자들을 비추던 나무 전봇대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세상 —— 긴담모퉁이길

‘인천의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인천 같다! 각반을 차고 목에 타월을 건 노동자들이 제각기 일터를 찾아가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타월을 귀밑까지 눌러 쓴 부인들이 벤또를 들고 전등불 아래로 희미하게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또 나타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미소에 다니는 부인들이라고 한다.’
‘신철’이 인천에서의 첫 추억을 떠올린 대목이다. 대학생 신철은 노동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흠모하는 여성 ‘선비’의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은 외면하는 이중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그는 부잣집 딸과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맞서 집을 나간 후,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인천으로 온다. 그가 새벽 출근길에 나선 노동자들을 바라보던 장소가 긴담모퉁이길이다. 길 위에는 짙은 어둠 속, 정미소 선미공들을 희미하게 비추던 나무 전봇대가 아직 남아 있다.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노동자들이 술 한 잔에 고단한 육체와 시름을 달래던 저잣거리가 나온다. 현 송도중학교(옛 서본원사터) 건너편이다. ‘신철이는 조반을 먹기 위해 길가에 늘어앉은 국밥집을 찾아 들어갔다. 흡사히 서울에선 선술집 모양이다. 벌써 노동자들은 밥에다 김이 펄펄 나는 국을 부어 가지고 먹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부어 넣은 탁배기를 선 채로 들이마시고 있다. 노동자들은 문에 불이 나게 드나든다.’ 신철은 이곳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던 ‘첫째’를 만났다. 황해도 용연마을 출신 첫째는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신철을 도우며, 그로부터 사회 문제와 노동 문제를 깨우친다.
 



동일방직 담길.
기숙 생활을 하며 통제 당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저 높다란 담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없었다.
그 맞은편에는 공장에 다니던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살던 주택가가 있다.


 
대한제분 앞길.
월미도 뚝방길로, 이 길로 소설 속
방적공장 여공들이

애탕신사로 야유회를 갔다.
 

“그들은 일제히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정 구두까지 신었다.
첫째는 흙을 지고 낑낑하며 오다가
참말 여공들이나 아닌가? 하는 의문과
무어라고 형용 못할 반가움에 흘금
바라보았다.”

 
이 길에서 첫째가 같은 고향 출신 ‘선비’를

보게 된다.


가로막힌 거대한 벽 —— 동일방직 담길

동일방직은 한때 우리나라 방직산업의 중심이자 노동 운동의 현장이었다. 이 회사는 당초 일본 오사카에 본사를 둔 동양방적 인천공장으로 출발했다. ‘1932년 12월 공사를 시작한 동양방적은 1933년 10월 1일 방기 3만1,488추와 직기 1,292대로 조업을 개시했다. 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면서 1,300여 명의 공장 근로자를 모집했다.’ (매일신보 1932년 5월 16일)
“공장의 대형화가 동일방직에서 시작됐습니다. 직원이 3,000여 명이 넘었어요.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당하면서, 점차 그들 목소리를 내고 노동 운동에 눈을 뜹니다.” 장회숙 선생의 말에 김인수 선생이 설명을 덧붙인다. “1970년대 여자가 직장에 다닌다고 하면 대부분 동일방직이었어요. 이 공장 여공들은 서슬 퍼런 유신 정권에 맞서며 우리나라 노동 운동에 한 획을 긋습니다.” 유신 말기, 동일방직에서 일하던 어린 딸과 누이는 알몸 시위를 하고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악착같이 일어났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동방적공장에서 혹독한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시대의 억압된 구조를 몸소 느낀다. ‘대동방적공장에서는 사숙을 허하지 않고 전 여공을 기숙사에 수용한다는 것이 한 철칙이었다. 내일은 일시에 기숙사로 들어가기로 생각을 하고 월미도로, 만국공원으로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들 대부분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할 만큼 통제받았다. 임금도 현금으로 주지 않고 통장을 만들어 회사가 보관하고, 감독이 채찍을 들고 감시했다.
‘유리문 밖에 운동장을 거쳐 높이 솟은 저 담! 아까 이 기숙사에 들어오면서부터 저 담이 몹시 걱정이 되었다. 벽돌로 까맣게 올려 쌓고 그 밑으로 몇 길이나 시멘트 콘크리트를 한 그 철벽같은 담에서는 바늘구멍만한 것도 하나 얻어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선비는 일하면서 얻은 병으로 죽어서야 담장 밖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견디고 견디며 살다 죽어간 이들의 혼이, 저 높다란 공장 담벼락 위로 포개고 포개져 있으리라.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쟁의 현장이에요.”
두량군들이 파업을 하던 인천항 야적장
‘칠통마당’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장회숙 선생.



인하대학교에 재직했던 고 윤진호 교수는 ‘조선신보’
1892년 5월 13일자에 보도된 ‘인천부두 두량군(斗量軍) 노동자들에 대한 기사’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쟁의로 기록된 1898년 목포노동쟁의보다
빠른 시기에 인천항 부두 노동자의 한 부류인
두량군의 노동조합이 존재했고,
파업으로 부당함에 맞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를 한국 노동운동사 첫머리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둠 뚫고 솟아오른 해 —— 축항

‘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신철이는 차츰 숨이 차오고 팔이 떨어져 오는 듯했다. 짐은 큰 상자며 철판이며 대두박이며 이런 종류였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려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
신철은 부두 노동자로 땀 흘리며 노동자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힘을 한데 모으지만, 육체노동의 고통 속에서 흔들린다. 결국 부두 노동자 파업으로 검거된 뒤 한계를 넘지 못하고 끝내 뜻을 굽힌다. 이를 본 첫째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노동자 계급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 문제’의 본질은, 식민지 지배 아래 소작농의 아들딸이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도시의 노동자가 되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부두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살기 위한 몸부림은 파업으로 이어졌다. 1926년, 1928년, 1933년, 1935년, 1936년에 각각 인천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각각 1,0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나아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전시(戰時)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해가 벌겋게 타올랐다. 그들은 저 해를 바라보면서 단결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다. 오늘의 저 햇발은 그들의 이 단결함을 보기 위해 저렇게 씩씩하게 솟아오르는 듯했다. 동시에 무력하고 성명없던 자기들이 오늘 이 순간에는 이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권리란 권리는 다 가진 듯이 생각됐다. 자기들이 단결함으로써 이러하고 있으니 기세를 부리던 백동테 안경을 위시해 기선의 기중기며 선원들까지 아주 동작을 잃어버리고 꼼짝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힘을 깨닫는 노동자들의 벅찬 감정이, 인천항에 뜨겁게 솟아오르는 태양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두 손 불끈 쥐고 살아갈 힘을 얻은 사람들. 그들에게 저 빛은, 내일의 희망이었다.



1930년대 인천항, 한국인 노동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1930년대 인천우체국(현 중동우체국),
세관 거리 풍경과 오늘의 모습.


 

1914년까지 인천 앞바다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스민 흙으로 메워졌다.
 


인천문화관광해설사는 지난 2017년부터 문학 작품 속에 담긴 인천의 장소를 찾아가는 문학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강경애의 ‘인간 문제’, 현덕의 ‘남생이’,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등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 문제’의 책장을 넘기며 걷는 길은,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를 확인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다. 문학 답사는 시 홈페이지(incheon.go.kr)에서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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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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