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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야기

제주 4.3 사건을 알고 있나요?

작성자
박예슬
작성일
2022-04-06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나타난 사건들이 있었다. 독재정치에 맞선 4.19혁명, 5.18 민주화 항쟁,  6.25전쟁 등 이러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들은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있다. 하지만, 제주 4.3사건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사건, 현재 몇개의 마을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야하는 사건. 제주 4.3사건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수 많은 제주민들의 희생을 통해 반드시 마음 깊은 곳에 심어야하는 교훈 하나를 알아보자.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리는 와중에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굼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린 아이를 친 기마 경찰은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나갔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분노하며, 그 기마 경찰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기마 경찰은 주변 경찰서로 도망쳤고, 이를 본 경찰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민 6명이 사망했다. 제주도 주민들은 이를 항의하기 위해 학생은 학교를 안가고, 버스도 안다니고, 공무원과 일부 경찰들도 출근하지 않은 무려 제주도 직장 95%가 참여한 "민관 함동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미군은 그 날이후 제주도는 "좌인 본거지"라고 규정했다. 제주도는 땅이 너무 척박해 모두가 하나같이 가난했고,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늘 과도한 공납에 시달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섬이었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뜻있는 청년들이 제주도를 다시 살려보기 위해 자치 활동을 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는 우리 나라의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미군들과 원만하게 공존하고 있었고, 해방이 되자 제주도로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그 시기, 역대급 대흉년이 연타를 치는 가운데, 미 군정은 공출제도까지 부활시켜, 척박한 중산간 마을에서 해안마을과 같은 양의 곡식을 가져갔다. 산속에서 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주민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수많은 경찰들과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이 계속해서 내려왔다. 서북청년단이 이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하나, "제주도민들은 빨갱이다." 제주의 경제와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기 보다는 규정하고 이용하려 들었던 존재들이었다. 1948년 4월 3일,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시뻘건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표방한 제주 남로당 ( 해방 직후 남한의 공산주의 정당)이 산에서 내려와 경찰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의 희생이 일어나게 됐다. 숱한 반대와 탄압 속에 열린 남한만의 단독 선거, 제주 선거구 두 곳만이 투표율 미달로 무효가 되면서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섬 전체에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  이승만이 명한다,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떠나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에 처할 것이다." 진압에 나선 연대장 송요찬은 명한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제주도 전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버려라" 지금의 경찰 청장에 해당하는 경무국장 조병옥이 명한다,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업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갑자기 악당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해도 좋은 대상이 되어 버린 제주도민들. 이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지금의 평화로운 섬 제주, 실은 내딛는 발걸음 곳곳이 모두 학살터이다.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한 월정리, 이곳은 군 주둔지여서 월정리에 끌려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틀 새 400여명이 죽은 북촌리, 남자가 모조리 죽고 없어서 무남촌이라 불렸다.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묻어두었던 세월 때문에 우리는 4.3사건을 잘 알지 못한다. 또한 4.3사건은 금기의 영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행사조차 공개적으로 열기 어려웠다.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봉행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야한다. 수 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오랜 세월동안 말하기 어려웠던 4.3사건을. 우리는 4.3사건을 보면서, 정말 큰 거하나 배울 수 있다. 나와 다른 주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증오했을 때 어떤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사람보다 이념이 먼저일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 4.3사건으로 우리는 이념보다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먼저라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출처 - (오늘001_4.3 희생자 추념일 / 큰 별쌤의 오늘) (제주 4.3 5분 요약 정리 / 씨리얼 정치수업)


22기 박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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