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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야기

장사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을 대성공으로 이끈

작성자
박예슬
작성일
2023-02-10

대한민국의 뼈아픈 역사, 6.25전쟁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동족끼리 칼을 겨눈 6.25전쟁, 이 전쟁과 함께 떠올리는 작전은 바로 인천 상륙 작전일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은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했던 인천 앞바다에서 시작된 작전이다.
북한군의 허리를 찔러 서울을 탈환하고,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인천 상륙 작전을 대성공으로 이끈 작전이 있다. 바로 학도병들이 참전한 장사 상륙 작전이다.
 
장사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4일, 인천 상륙 작전 하루 전이었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 해변을 목적지로 하는 문산호에 많은 학도병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육본 직할 독립 제1 유격대대라는 이름을 달고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북한군 몰래 상륙하는 것이 이들의 작전이었는데 북한군은 문산호를 발견해버리고, 문산호를 향해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이 상황에서 학도병들은 배에서 하나둘씩 상륙했다.
상륙하자마자 총에 맞아 쓰러진 학도병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북한군들에게 공격하며 버티고 버텨서 200고지를 탈환했다.
작전 개시 12시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숨을 돌리는 순간도 잠시뿐 북한군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도병들은 주된 임무였던 북한군의 제2군단의 주보급로인 7번 국도를 폭파해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임무를 성공했지만 북한군들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후에 구조선이 도착했고, 이들은 구조선에 타려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구조선도 북한군들이 또다시 발견해 또 거센 공격을 해왔다.
결국 북한군들의 거센 공격 때문에 이 구조선도 침몰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구조선은 예상보다 빨리 출발하게 되었다.
아직 수십 명의 학도병들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장사리 해변에 남아있는 약 40여 명의 학도병들은 북한군들의 포로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탈출했던 인원도 잘 모른다.

장사 상륙 작전은 북한군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인천 상륙 작전도 대성공을 이루었다.

장사 상륙 작전은 원래 2~3일 정도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6일간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북한군의 주보급로인 7번 국도도 차단했다. 이들 대부분이 훈련도 완벽하게 받지 않았던 학도병이었다.
이들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전 중에 하나이다. 청춘들의 기적을 꼭 기억하고, 감사하자.

장사 상륙 작전에 참전한 학도병들은 772명, 이들 중 사망자와 실종자는 139명, 부상자는 92명, 포로로 40 여명이 잡혀갔다고
알려져 있지만, 하나도 정확한 것이 없고 전부 추정치이다.
그리고 전쟁 후 44년이 지난 1997년 3월에 국가보훈처와 해병대가 처음으로 희생자 유골 인양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하게도 유해 수습 0명이었다.
그리고 2022년 초에 두 번째로 발굴했지만, 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1997년에 좌초된 채로 방치되어간 문산호를 인양한 것이 전부였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이명흠 대위는 죄책감으로 30년 동안 작전 명령서에 의지해서 홀로 학도병들의 명단을 만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도움은 하나도 없었다. 
현재 생존해 계신 당시 학도병 분들을 대부분 90대 할아버지가 되셨고, 스무 명도 안 되는 인원이다.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한 명이라도 찾아서 가족품에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들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고, 국가는 국가유공자들은 향해서 더 큰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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