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 봉기와 그에 대한 진압 과정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민간인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른바 ‘제주 4·3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에는 해방 이후 미군정과 좌·우익의 대립, 단독 선거 추진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3·1절 기념 집회에서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자 도민들의 반감은 크게 고조됐다. 이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단독 선거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정부와 군·경은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특히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주민들이 무장대와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고문·학살이 벌어졌다. 무장대 또한 경찰, 우익 인사, 선거 참여자들을 공격하며 희생을 키웠다.
그 결과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약 6년간 이어진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학계와 정부 조사에 따르면 최소 2만 5천여 명에서 3만 명에 달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가 넘는 규모였다.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가족들은 연좌제와 낙인 속에 고통을 겪었다.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폭동’으로 규정돼 진실이 은폐됐다. 그러나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와 희생자 명예 회복이 진행되었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으며, 이후 희생자 추념식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제주 4·3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과 인권 문제를 되새기게 하는 현대사의 중요한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