糖鼓火烧,绝非空有其表
공갈빵, 속 빈 빵이 아니다

糖鼓火烧在韩文中名为“恐喝”,如今这个词在韩国只是一个法律术语。然而在过去的韩国,“恐喝”多指谎言、欺骗或讹诈,即徒有虚表、虚张声势的恐吓。糖鼓火烧以趣名“恐喝”而闻名,其背后不为人知的故事,这就为您娓娓道来。
한국의 한자어 ‘공갈(恐喝)’은 현재 주로 법률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상대방에게 겁을 주지만 실제로는 아무 실속이 없는 거짓된 행위, 즉 ‘거짓말’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곤 했다. 흥미로운 이름 속에 숨겨진 공갈빵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那么大的饼,买来一尝“里面竟空空如也!”,说这张饼“骗人”也不为过。即便如此,此饼也绝非“空有其表”。其历史由来亦不同凡响。2009年被列入中国地方非物质文化遗产的糖鼓火烧,诞生于1864年的中国大连。而在20世纪初的韩国,曾有被称为“胡饼商”或“胡饼家”的店铺,推出了一种当时引发轰动的新式点心——即“胡饼”。其热门程度甚至催生了以《胡饼店》为题的小说在报纸上连载。如今听起来十分陌生的“胡饼”正是“糖饼”,卖糖饼的“胡饼商和胡饼家”就是“糖饼店”。胡饼是如何演变成糖饼?胡饼和糖鼓火烧有何关联?“饼”、“糕”、“面包”又有何关联?“糖鼓火烧”看似简单,实则内有乾坤。
1882年,朝鲜与中国签订了平等互惠的《朝中商民水陆贸易章程》。随着中国在朝鲜汉城设立公馆,朝鲜也在中国天津设立公馆,两国商人来往日益频繁。当时中国的物资大量流入朝鲜,中国的文化与技术也随之传入,自然包括各种朝鲜没有的食物。其中之一便是“胡饼”——即“糖饼”。
韩国的“糖饼”通常专指铁板油煎的糖馅饼。但过去华侨经营的“胡饼家”,即“糖饼店”则并非如此。据多方记载,当时华侨糖饼店售卖的胡饼大概有10种之多。1. 内涂蛋清、外抹蛋黄后烤制的红豆馅饼——鸡蛋饼;2. 刀刻花纹的菊花饼;3. 扁平烤制的烤饼;4. 黑糖馅烤制的糖火烧;5. 硬面团制作的杠头;6. 红豆馅外撒芝麻的芝麻饼;7. 糖馅烤得鼓鼓的糖鼓子;8. 肉馅烤制的肉火烧;9. 素菜馅烤制的素火烧;10. 无馅烤制的叉子火烧。没错!“糖鼓子”正是糖鼓火烧,而糖鼓火烧就是一种糖饼。比这更令人意外的是,中国中秋节的节日美食“月饼”也属于糖饼的一种。这解释了为何糖鼓火烧常与月饼并列。
相传,胡饼由东汉班超(32-102)出使西域后传入中原。此处的“西域”指今中国新疆及中亚一带。据《续汉书》记载“灵帝好胡饼”,诗人白居易(772-846)也在《寄胡饼与杨万州》一诗中提及胡饼,足见其当时流行之广。

在韩国,汉字“胡”被称作“胡虏之胡”,常带贬义解读——这是清朝统治中国后才出现的现象。往来欧亚大陆的中国北方民族自称“胡人”,最终入主中原,曾与明朝结为血盟的朝鲜,对清朝自然难有好感。朝鲜末期受日本影响,这种情况尤甚。因此宜将唐朝时期由西域传入中原的胡瓶(一种酒器)、胡琴、胡椒、胡桃、胡瓜等,与朝鲜末期传入朝鲜的胡白菜、胡韭菜、胡面等进行区分看待,而“糖饼”的归属问题则略显复杂。
在日本殖民统治时期,日本蔑称胡饼为“支那饼”,相关店铺则被蔑称为“支那面食店”(现称“中华”或“中国”)。随着日本战败撤离以及朝鲜战争的结束,昔日的糖饼店逐渐换上了“中国面点”、“中华面点”、“馒头”、“中国饼干”等招牌。大多数糖饼店摇身一变,转型为了小规模的中华料理店。随着炸酱面引发新一轮热潮,往日的糖饼店和各式糖饼,已逐渐淡出了人们的记忆。
糖鼓火烧,这种由中国传入韩国的糖饼,在那看似外强中干的外表下,其空心的内里却承载着韩中两国文化与饮食交流的厚重历史。
커다란 빵, 막상 사서 먹어보니 “속은 텅 비어 있더라!” 이 빵이 공갈을 쳤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속이 빈’ 빵으로 치부할 일도 아니다. 그 역사적 유래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009년 중국 지역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공갈빵은 1864년 중국 다롄(大連)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한국에는 ‘호병상(胡餠商)’ 혹은 ‘호병가(胡餠家)’라고하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20세기 초, 센세이션을 일으킨 새로운 음식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호떡’이다. 《호떡집》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신문에 연재될 정도였다. 지금 들으면 매우 생소한 ‘호병(胡餠)’이 바로 ‘호떡’이고 호떡을 파는 가게 호병상, 호병가가 바로 ‘호떡집’이다. 호병이 어떻게 호떡이 되었고. 호떡과 공갈빵은 무슨 관련이 있고. ‘병(餠)’, ‘떡’, ‘빵(pão)’은 또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공갈빵’, 진정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1882년, 조선과 중국은 동등한 국가 대 국가로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중국은 조선 한성(漢城)에 공관을 세우고 조선도 중국 톈진(天津)에 공관을 세우면서 양국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물자가 대량으로 조선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의 문화와 기술 또한 들어오는데 조선에는 없던 음식들도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호병’ 즉, ‘호떡’이다.
한국에서 ‘호떡’이라고 하면 철판 위 기름에 지진 호떡만을 가리키는데 예전 화교들이 운영했던 호병가 즉, ‘호떡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화교들이 운영하던 호떡집에서는 10가지 정도의 호떡을 팔았는데 1. 안쪽은 달걀흰자를 바르고 겉에는 달걀노른자를 발라 구운 팥소의 빵인 지단빙(雞蛋餅, 계란빵), 2. 칼로 꽃모양을 낸 주화빙(菊花餅, 국화빵), 3. 납작하게 구어 낸 빵인 가오빙(烤餅), 4. 흑설탕 소를 넣고 구운 탕훠샤오(糖火燒, 당화소), 5. 딱딱한 반죽의 빵인 강터우(杠頭), 6. 팥소를 넣고 겉에 깨를 묻힌 쯔마빙(芝麻餅, 참깨빵), 7. 속에 설탕을 넣고 부풀게 구어 낸 탕구쯔(糖鼓子). 8. 고기 소를 넣고 구운 러우훠샤오(肉火燒), 9. 야채 소를 넣고 구운 수훠샤오(素火燒) 10. 소를 넣지 않고 구운 차아쯔훠샤오(叉子火燒) 등이 있었다. 그렇다! ‘탕구쯔(糖鼓子)’가 바로 공갈빵이고 공갈빵은 호떡의 일종인 것이다. 사실 공갈빵이 호떡의 일종이라는 것보다 더 뜻밖의 사실 하나가 있는데 중국에서 추석에 먹는 ‘월병(月餠)’도 호떡의 일종이다. 공갈빵 옆에 월병이 있기도 한 이유다.
호병은 한(漢)나라 반초(班超32~102)가 서역에 다녀와서 전해진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서역은 유라시아 지역을 말한다. 《속한서續漢書》에는 “靈帝好胡餠(영제는 호병을 즐겨먹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중당(中唐)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 〈寄胡餠與楊杨萬州〉에도 호병이 등장해 당시 호병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한국에서는 한자 ‘호(胡)’를 오랑캐 호라고 한다. 그래서 폄하는 뜻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청(淸)이 중국을 집권하고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오가는 중국 북쪽의 민족이 스스로가 호인(胡人)이라고 하고 결국 중국을 집권하니 명(明)과 혈맹이었던 조선이 청(淸)을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구한말에는 일본의 영향으로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 서역에서 들어온 호병(胡甁, 전래의 술 붓는 그릇의 하나), 호금(胡琴), 호추, 호도, 호박 등과 구한말에 들어온 호배추, 호부추, 호면 등을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나 ‘호떡’은 어디에 속해야하는 지 다소 복잡해진다.
일본은 호병을 ‘支那パン(지나빵)’이라고 불었고 호병상(집)을 ‘支那パン屋(지나빵옥)’이라고 불렀다. 일본이 물러나고 한국 전쟁이 지나 화교가 운영하는 과거의 호떡집 간판에는 ‘중국빵’, ‘중화빵’, ‘찐빵’, ‘중국과자’ 등의 문구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대부분의 호떡집은 소규모 중국집으로 전향한다. 이번엔 짜장면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호떡집 대부분의 호떡들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가고 있다.
공갈빵, 겉만 크고 속은 빈 빵처럼 보이지만 중국에서 유래한 호떡의 일종으로 한국과 중국 간 문화·음식 교류의 풍부한 역사적 흔적을 그 빈 곳에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