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기획 특집 | 도시의 온기
이곳이 진정한 핫플,
도시의 숨겨진 온기를 찾아
기온이 영하 10도를 한참 밑돈다. 강풍이라도 불면 이 수은주의 눈금조차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말 그대로 체감온도를 ‘체감’하게 된다.
겨울의 칼바람은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다.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게
하고,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는 일조차 포기하게 만든다. 겨울의 행동대장답게,
그 바람에서는 배려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이윽고 잔뜩 움츠린 사람들의
모습만 거리 위에 남는다.
냉기와 삭풍이 지배하는 겨울의 도시. 온기가 더없이 절실한 계절이 지나고 있다.
잠시라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얼어붙은 손발보다 마음이 먼저 풀릴 것만 같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거리 어딘가를 데우고 있을지 모를 온기를 찾아
나섰다. 만약 찾는다면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핫플’(Hot Place)이 아닐까 싶었다.
글. 사진. 임성훈 본지 편집장


기다림의 시간을 온기로 달래주는
엉따벤치 ©황지현

스마트 버스정류장
기다림을 존중하는 시간, 엉따벤치와 스마트 정류장
중구 신흥동의 한 버스정류장.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비교적 한산하다. 시민 한 명이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이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벤치가 이른바 ‘엉따벤치’(온열벤치)로 바뀐 것은 지난해 말이다. 이전까지 이 버스정류장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벤치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한겨울 얼음장 같은 벤치에 앉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제는 직장인과 학생, 각자의 삶에 이끌려 버스정류장에 모인 이들이 같은 온도를 공유하며 잠시나마 추위를 피한다.
직접 앉아보니 미묘한 온기가 엉덩이를 통해 전해진다. 뜨겁지는 않지만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기에는 충분한 따뜻함이다. 구도심 길거리에서 만난 벤치 하나가 “이제 좀 괜찮아?”라고 말을 건네는 듯했다.
벤치에서 일어나는 순간, 온기는 다시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질 게 뻔하다. 하지만 이 벤치는 겨울마다 누군가의 고단한 하루를 조금씩 위로할 것이다. 잠시나마 벤치에 앉은 이의 몸과 마음을 녹이면서.
열적외선 카메라로 버스정류장을 비춘다면 엉따벤치는 유일하게 붉은빛을 띨 것이다. ‘핫플’ 의 자격을 기계가 증명하는 셈이다. 버스정류장의 일부인 엉따벤치가 핫플이라면 구월동의 한 버스정류장은 그 자체가 핫플이다.
찬 바람을 막아내는 밀폐형 구조, 열고 닫는 수고를 덜어주는 자동 유리문, 냉·온방 시설이 갖춰진 단정한 내부….
안으로 들어서니 귓전을 때리던 바람 소리가 일순간 멈춘다. 스마트 버스정류장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추위로부터 행인들을 보호하는 작은 요새 같았다. (버스를)‘기다리는 장소’인지 ‘쉬는 장소’인지 경계가 흐려질 정도다. 공간에 취해 잠시 긴장의 끈을 놓고 있다가 버스 한 대를 놓치고 말았다.
도시의 품격은 이처럼 소소한 순간에 드러난다. 물론 모든 버스정류장에 엉따벤치가 설치돼 있고 모든 버스정류장이 스마트버스정류장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례들은 도시가 시민에게 건네는 배려의 손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천이라는 도시 곳곳에는 더 많은 배려의 손길이 숨어있을 것이다.

한파쉼퍼에서 김영자·김영희 시민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한파쉼터가 마련된 동암교회 비전센터
조건 없이 열리는 공간, 한파쉼터
겨울의 도시는 선을 긋는다. 안과 바깥, 따뜻한 쪽과 차가운 쪽, 조건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조건을 충족해야 들어갈수 있는 곳….
선이 나눈 경계는 온기를 누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조용히 가른다. 그래서 한파가 닥치면 도시는 더 차가워진다. 그런데 그 선이 무색해지는 곳도 있다. 부평구 십정동에 자리한 한파쉼터(동암교회 비전센터)가 그렇다. 이곳은 ‘안’(실내)이면서 ‘따뜻’하고 ‘조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동암남부역에서 10분 남짓 걸어 이 한파쉼터에 들어서니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난방에 깔끔한 인테리어는 카페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안쪽에는 책으로 빼곡한 서가가 있어 작은 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와 피아노까지 갖춘 이곳은 단순한 쉼터를 넘어, 정서적 안정감까지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핫플’의 종합판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만큼, 교인들만의 공간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선입견이 깨지는 데는 불과 몇분이 걸리지 않았다. 헬멧을 쓴 배달 근로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잠시 숨을 고른다. 아메리카노 가격은 1천 원. 장시간 바깥에서 일하던 이들에게 이곳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김영자씨는 “이 공간은 교회의 부속 시설이지만, 교인과 비교인을 가리지 않는 모두의 사랑방”이라며 “어르신들이 추위를 피해 쉬다 가고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놀다가는 등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밖의 체감온도는 영하 15도.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단지 한파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곳의 아늑함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울을 견디게 하는 힘, 그리고 온실


인천대공원 온실 ©인천대공원 제공


청라생태공원 온실 ©인천환경공단 제공
엉따벤치, 스마트 버스정류장, 한파쉼터가 품고 있는 시간은 겨울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봄이 온다. ‘사계’ 중 봄, ‘봄의 제전’의 봄, ‘봄날은 간다’의 봄, ‘벚꽃 엔딩’의 봄이 모두 다르듯, 봄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 봄에는 공통점이 있다. 만물을 생동케 하는 창조력이다. 그 힘을 겨울 한복판에서 미리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온실이다. 온실은 겨울의 도시가 품고 있는 작은 봄이다.
겨울과 봄이 충돌하는 순간은 당혹스러웠다.
청라생태공원 온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안경을 점령한 안개 때문이다. 이어 시야가 조금씩 확장되는 것과 비례해 계절이 바뀌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겨울은 문밖에서 여전히 위용을 떨치지만 이곳에선 이미 봄날이 가고 있었다.
열대성 수목과 지피식물을 활용하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열대원’과 동양란으로 향기롭게, 서양란으로 화려하게 꾸몄다는 ‘난원’을 둘러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비로야자, 익소라, 몬스테라 등 이름도 생소한 수목들은 조급해하지 말고 봄을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했다. 도시의 온실은 이렇게 겨울을 견디게 했다.
온실밖으로 나오자 겨울은 여전히 차가웠다. 온실의 여운 때문일까. 이내 온실이 그리워진다. 어느덧 발걸음은 인천대공원 온실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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