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천에서 인천으로_ 삶의 기록
할아버지 사진 한 장
「 굿모닝인천 」이 기록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자리
“할아버지 사진 한 장만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봄볕이 다사하게 내려앉던 오후였다.
편집부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차이나타운 옛 개성정육점, 김병길 어르신의 손주였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 책장 깊숙이 꽂혀 있던 14년 전 「굿모닝인천」에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그 얼굴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기억이 났다. 2012년을 한 달 남긴 겨울이었다. 먼지 자욱한 창고 서랍에서 필름 스캔 파일을 찾았다.
차이나타운, 빛이 비켜간 골목 한켠에 앉아 있는 한 어르신이 보였다.
그렇게 건넨 사진 한 장. 그 순간, 오래전 만났던 다른 얼굴들이 떠올랐다.
교동도 골목, 거울 앞에서 손님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주던 이발사. 만석동 골목, 저울 없이 주꾸미를 담아주던 주인 할머니.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손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다시 찾아갔을 때는 허리가 조금 더 굽어 있었다. 해마다 그들은 조금씩 작아져 갔다. 그러다 어느 해부터인가, 그 자리에 낯선 얼굴이 서 있었다.
서른두 해, 「굿모닝인천」은 인천을, 인천 사람들을 담아왔다. 그 사이 누군가는 떠나고 어떤 공간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아직, 누군가 머물러 있다. 삶은 계속된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에이이미지스튜디오 165



차이나타운 정육점 주인 김병길(2012), 만석동 주꾸미 할머니 우순임(2020),
교동도 이발사 지광식(2018). 『굿모닝인천』이 기록한 사람들. 그들은 떠났지만, 삶은 이어진다.
※ 1994년 창간 이후, 『굿모닝인천』은 인천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목소리를 녹음하고, 삶을 기록했습니다. 몇 해가 지나 다시 찾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여전히 누군가 서 있습니다.
이것은 『굿모닝인천』이 기록한 사람들과, 그 자리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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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뒤, 남은
김병길.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문득, 2012년 그 겨울이 떠올랐다. 차이나타운, 붉은 간판들이 이어진 골목 사이 빛이 비껴간 자리. 남루한 정육점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오후 햇살이 얼굴 한쪽에 희미하게 걸쳐 있었다.
“숨 붙어 있는 날까지 이 자리를 지킬 거야.” 목소리는 호기로웠으나 눈빛은 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빛이 기울어 가고, 그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눈빛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이 골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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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익─’ 화덕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밀가루 냄새와 고기 냄새가 섞여 골목 끝까지 번진다. 차이나타운의 화덕만둣집 십리향十里香, 곡창준이 불 앞에 선다. 열기가 얼굴을 감싼다. 손등에 하얗게 묻은 밀가루를 털어내고 다시 반죽을 민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화교 2세. 이 골목에서 16년째 같은 자리다.
그가 처음 이 골목에 왔을 때 어르신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혼자였다. 어르신은 6·25 때 평안남도 맹산에서 내려와 연탄을 나르고 소 마차를 끌다, 이 골목으로 흘러 들어왔다. 대형마트가 생기고 중국요릿집이 하나둘 늘어도 끝내 그 자리를 지켰다. 중풍을 앓은 손으로 낡은 도마를 짚고 무뎌진 칼날을 세우며 하루를 열었다.
“도와드려야겠다 싶었어요.” 값이 비싸면 비싸게,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그 집에서 고기를 가져다 썼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여름 끝에 또 가을이 왔다. 김병길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가게 문을 열었고, 만둣집 주인은 매일 그 집 문턱을 넘었다. 8년의 시간이 그렇게 쌓였다.
“제게도 고마운 분이었어요. 그분도 우리를 많이 챙겨주셨지요.”
손님이 정육점을 찾으면 어르신은 옆집을 가리켰다. “저기 화덕만두 만드는 거, 한 번 보고 가요.” 그 한마디에 발걸음이 만둣집으로 이어졌다. “몸이 불편하신데도 가게 앞까지 나와서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어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어르신도 그도, 이 골목에서 버텼다.
어느 겨울, 어르신 집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곡창준이 손수 지붕을 손봤다. 어르신이 빌라로 이사한 뒤에는 요구르트를 사다 보내곤 했다. 그가 유난히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끊겼다.
어르신은 이제 없다. 곡창준은 오늘도 화덕 앞에 선다. 불을 지피고 반죽을 밀어 만두를 빚는다. 같은 자리에서 16년을 보냈다.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는요.” 오래전, 돌아가신 어르신도 같은 말을 했다. 숨 붙어 있는 날까지, 이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십리향의 곡창준. “몸이 허락하는 데까지는요.”
김병길이 했던 말을 그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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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발소
‘위잉─’
바리캉 소리가 멈춘 지 3년이 지났다.
아버지의 가위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면도 거품 향이 머물던 곳에.
두 딸도 남았다.
‘위잉─’ 섬에 바리캉 소리가 멈춘 지 3년이 지났다. 교동도 이발관 간판 아래, 지금은 두 딸이 밀가루 반죽을 민다. ‘푸우─’ 김이 피어오르며 술빵이 부풀어 오른다. 단내가 좁은 가게 안을 채운다. 면도 거품 향이 머물던 그 자리를.
교동도의 마지막 이발사, 지광식. 열다섯에 이발소로 왔다. 청소하고 물 긷고 손님 머리 감기며 한 달을 일해도 손에 쥔 돈은 담뱃값이 안 됐다. 3년이 지나서야 이발사가 가위 잡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 뒤로 20년을 한자리에서 일했다. 월급을 모아 쌀 이백 가마니를 주고 가게 주인이 됐다. 교동도에 이발소가 예닐곱 군데 있었지만 이 집이 제일 잘나갔다.
오늘도 두 딸은 이발소 문을 연다.
국수를 뽑고, 술빵을 빚는다.
‘푸우욱─’ 김이 솟아오른다.
면도 거품 향이 머물던 자리에
단내가 번진다.
막내딸 지용미는 기억한다. 손님이 없는 오후면, 아버지가 딸을 의자에 앉혀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겼다. 물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손으로 막아주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천천히 말려주셨다. 면도 거품 향이 아버지 옷깃에 배어 있었다. “앞머리가 눈을 찌르겠네.” ‘싹싹─’ 딸이 웃었다. 거울 속 아버지도 같이 웃으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도 다 큰 딸의 머리를 잘라주셨다.
그 다정한 아버지에게 신장병이 왔다. 이틀에 한 번 투석을 받아야 했다. “자식들에게 미안해.” 투석한 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손님이 오시면 가운을 갖춰 입으셨다. 아프다는 말씀은 아들딸들 앞에서는 더욱,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두 딸은 일주일에 닷새를 고향집으로 왔다. 섬과 육지를 배로 오가며 아버지 곁을 지켰다. “자식이니까요. 당연히 하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시면… 덜 울려고요.”

지광식. 이발관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오늘도 가위를 든다.

지광식의 두 딸, 지용려와 지용미.
아버지는 떠났지만, 딸들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2021년, 교동이발관 앞에 선 지광식과 두 딸 그리고 증손자.
아버지는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기일과 같은 날이었다. 오빠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눈을 감으셨다. 바리캉 소리가 멈춘 뒤에도 딸들은 매일 이발소 문을 열었다. 거울을 닦고 바닥을 쓸었다.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자리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언니, 이거 봐요.” 동생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속에 아버지가 있다. 가위를 들고 손님의 머리를 자른다. ‘위잉─’ 낯익은 바리캉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잘라야 시원해.” 그리운 목소리다. 두 딸이 나란히 앉아 화면을 한참 바라본다. 서로 말이 없다.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전화기를 덮는다.
오늘도 두 딸은 아버지의 이발소 문을 연다. 큰딸은 국수를 뽑고, 작은딸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술빵을 빚는다. ‘푸우욱──’ 포근하게 김이 솟아오르고 반죽이 통통하게 부푼다. 면도 거품 향이 머물던 자리에 단내가 번진다. 거울을 본다. 김이 뿌옇게 서려 시야를 흐리다 서서히 걷힌다. 그 너머로 빈 의자가 보이고, 아버지가 서 계시던 자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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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없는 첫 봄
봄이다. 할머니가 없는 첫 주꾸미 철이 왔다.
새벽 네시 반, 알람이 다시 울린다.
만석동 골목에 불이 켜진다.
‘띠리링─’ 새벽 네 시 반, 알람이 울린다. 만석동 주꾸미 골목, 이금례가 눈을 뜬다. 남편 김홍명이 먼저 일어나 어판장으로 향한다. “그놈의 주꾸미는 얼마나 예쁘길래 맨날 가.”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남편이 문을 나서면 그도 앞치마를 두른다. 40년째 같은 시간이다.
올해 2월, 시어머니 우순임이 세상을 떠났다. 아흔셋이었다. 서른 살에 만석고가 밑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해 만석동 주꾸미 골목의 원조가 된 사람이었다. “저울의 개념으로 장사하면 안 된다. 음식은 파는 게 아니고 나누는 거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쉬는 날이 없었다. 손에서 주방 일을 놓은 건 몸이 버티지 못했을 때뿐이었다.
시어머니는 쉽사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렵게 배웠죠. 어머니 뒤에서 열심히 도와드리면서 보고 익혔어요.” 그 시절 가을이면 고추를 200박스씩 말렸다. 만석동 골목마다 붉은 융단이 깔렸다.
‘툭툭─ 투두둑─’ 새벽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면 벌떡 일어나 맨발로 뛰어나갔다. 고추가 젖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다. 손끝이 시려도 멈추지 않았다.
김장철이 오면 배추 200포기로 김치를 담갔다. 고춧가루를 버무리고 또 버무리다 보면 손톱 밑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손을 씻고 또 씻어도 매운 냄새가 남았다. 그 손으로 주꾸미를 주무르고 육수를 끓이고 간을 맞추고, 40년이 그렇게 흘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손을 잡았다.
거칠어진 손을 한참 들여다보셨다.
“나처럼은 살지 말아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며느리는 쉬지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도 알고 있었다.

이금례와 남편 김홍명. 새벽 네시 반이면 남편은 어판장으로, 아내는 주방으로. 40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시절 가을이면, 만석동 골목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주꾸미 할머니 우순임의 손.
“나처럼은 살지 말아라.” 하지만 며느리의 손도 그렇게 거칠어졌다.
오래 병상에 누워 있던 시어머니가 언젠가 며느리 손을 꼭 잡았다. 거칠어진 손을 한참 들여다보다 말했다. “나처럼은 살지 말아라. 쉬어가면서 해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며느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으리라. 그도 자신처럼 평생 뜨거운 불솥 옆을 지키다 가리라는 것을.
올봄은 할머니 없이 맞이하는 첫 주꾸미 철이다. 만석동 골목에서 함께 장사하던 집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는 병상에 누웠다. 이제 이 집만 남았다. 식사 때가 되자 손님이 하나둘 가게 문을 연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손님이 잠시 말을 잃는다. 며느리가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 간자미무침을 한 접시 담아 상 위에 올린다. 주문하지 않은 것이다. 할머니가 손님을 대하던 방식이다.

며느리 이금례. 시어머니가 떠난 뒤, 혼자 주방에 선다.
“자신 있어요."
평생을 묵묵히 일했다. 앞에 나선 적이 없다. 시어머니가 간을 보면 옆에서 불을 줄이고, 손님을 맞으면 뒤에서 그릇을 날랐다. 며칠 전, 누군가 물었다. 혼자 할 수 있겠냐고. 자신 있냐고.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자신 있어요.”
봄이다. 새벽 네 시 반, 알람이 다시 울린다. 만석동 골목에 불이 켜지고 불판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할머니가 없는 첫 쭈꾸미 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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