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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인천에서 인천으로 | 동인천 옛 과자점 ‘인천당’

2026-01-31 2026년 2월호

새벽 두 시, 

달콤함의 무게


‘인천당’ 강동기·표용해 부부



‘띠리링─, 띠리링─’ 새벽 두 시,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눈을 비비고 옷을 대충 걸친 채 집을 나선다. 오십여 년이 흘렀어도 이 시간에 눈 뜨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동인천역 앞 옛 과자점 인천당. 가게 문을 열고 가스 불을 켠다. 오래된 쇠틀을 든다. 7킬로그램, 가벼운 것도 4킬로그램은 된다. 차가운 쇠가 손바닥에 닿고, 굳은살 박힌 손에 무게가 실린다. 

팔이 저리고 어깨가 뻐근하다. 그 무게를 들어 올리며 하루를 시작한 지, 반평생이다.

‘지글─, 지글─’ 쇠판이 달아오르고 반죽이 부풀어 오른다. 단내가 비좁은 가게를 채운다.

동인천역 일대에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새벽빛은 어김없이 비추어 든다. 오늘도.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에이이미지 스튜디오




노릇하게 익은 센베이 

월급날 아버지 외투 주머니에서 아이들 손으로 건네지던 온기



단내


그 시절, 동인천역 앞은 인천의 심장이었다. 인천 사람이라면 다 이 골목으로 모여들었다.

1973년 봄, 부부는 방 하나를 구하려고 그 골목을 헤맸다. 충남 공주에서 올라온 열아홉 표용해, 경상도에서 온 스물넷 강동기. 둘 다 손에 쥔 건 없었다. 남편은 거성산업 목재소에서 온종일 톱밥을 뒤집어쓰며 일했고, 아내는 갓난아이를 업고 버텼다. 없는 살림에 늘 빠듯했다.

“방이 딸려 있다더라.”

그 말 하나 듣고 인현통닭 옆, 세 평짜리 가게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쇠틀 위에서 과자 익는 냄새가 훅, 하고 밀려왔다. 달고도 진했다. 허기진 배가 먼저 반응했다. 가게 주인 집에 셋방을 들었다. 친척 형님이라 불렀지만 원래는 아주 남이었다. 

가게 주인은 젊은 부부를 눈여겨봤다. 남편을 볼 때마다 “동생, 동생” 하고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 쇠틀을 닦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아우, 목재소에서 그 고생 작작하고. 이거 한번 배워봐.” 그 말이 시작이었다.


쇠틀 하나의 무게 5~7킬로그램. 

그 무게를 들어 올리며 반평생이 흘렀다.


아래. 오십여 년을 함께한 저울. 

손때 묻은 눈금이 세월을 말한다.


남편은 주중에는 목재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가게로 향했다. 여섯 달을 그렇게 오갔다. 

틀을 어느 온도까지 달궈야 하는지, 반죽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펴야 하는지, 손목을 언제 꺾어 과자를 말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주인은 서툰 손이 익도록 푼돈까지 쥐여주며 기다려줬다. 그러고는 자신이 쓰던 도구를 전부 넘기고 신포동에 새 가게를 열었다.

이천오백만 원. 큰돈이었다. 부부는 일수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종일 쉬지 않고 일해도 빚을 갚느라 바빴다. 세 평이 전부인 공간. 화장실도 없어서 급할 때면 지하상가까지 뛰어가야 했다. 서너 번 갈 일을 한 번으로 버텼다. 설거지는 길바닥에서 호스를 끌어다 했다. 피곤한 날이면 반죽대 아래 재료를 쌓아두고 그 위에서 쪼그려 잤다. 몸이 망가져갔다. 그래도 젊었다. 힘든 줄 몰랐다.

“엄청 고마운 분이에요. 그런데 환갑도 못 넘기고 돌아가셔서….” 아내가 말끝을 흐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


 


부부. 등을 돌리고 있어도 안다.

손끝이 멈추는 박자도, 숨이 길어지는 순간도.



있는 힘을 다해서 정성껏. 

꾀 안 부리고, 눈속임 안 하고.


국민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가는 길. 

과자 한 봉지에 그 시절이 담겼다.


인천당. 인현동에서 용동으로, 

단골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뺨이 기억하는 온도 


틀이 달아오른다. 남편이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왼쪽 뺨을 댄다. 열기가 피부에 닿는다. 잠시 멈췄다가 반대쪽으로 옮긴다. 양쪽을 견주어 본다. 불 위에서 한 면을 굽고 뒤집어 다른 면을 마무리한다. 온도가 어긋나면 한쪽은 타고 한쪽은 설익는다.

온도계는 없다. 오십여 년 동안 뺨이 기억해 온 열기, 그 감각이 이 집의 기준이다. 반죽도 기계 대신 손으로 한다. 밀가루와 설탕, 계란을 섞어 전통 방식으로 치댄다. 

“기계로 돌리면 반죽이 질겨져서 못 써.”

숟가락으로 떠올렸을 때 천천히 흘러내려야 알맞은 농도다. 손목이 기억하는 힘, 손바닥이 아는 되직함이다.


부부는 오십여 년 전, 가게를 인수받을 때 종이 한 장을 함께 건네받았다. 밀가루 얼마, 설탕 얼마, 계란 몇 개… 삐뚤삐뚤한 손글씨로 적힌 배합표였다. 그 비법을 지금도 그대로 쓴다.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벽면에는 나무 도구들이 걸려 있다. 손때가 켜켜이 쌓여 반들거리는, 가게를 넘겨받을 때 함께 딸려 온 것들이다. 새 기계를 들여 편하게 일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평생 바꾸지 않았다. 아무것도.

“있는 힘을 다해서 정성껏. 꾀 안 부리고, 눈속임 안 하고. 그게 우리가 배운 방식이야.”



1973년, 가게와 함께 넘겨받은 도구들.

손때가 켜켜이 쌓여 반들거린다.


처음은 세 평이 전부였다.

그 안에서 반평생을 버텼다.


반쪽


반쪽이야. 내 반쪽. 

모든 걸 의지하고 살았어.


새벽 두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는 가게에서, 해가 지면 집에서. 부부는 하루를 온전히 붙어 산다.

남편이 반죽을 치대면 아내가 소를 넣고, 아내가 틀을 닦으면 남편이 불을 올린다. 쇠틀이 달아오르고 달큰한 냄새가 두 사람 사이로 번진다. 등을 돌리고 있어도 상대가 뭘 하는지 안다. 손끝이 멈추는 박자도, 숨이 길어지는 순간도. 오십 년이면 몸이 먼저 읽는다.

싸울 일도 많았다. 지친 날이면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공간, 피할 데가 없다. 말이 말을 물고, 화로의 열기가 둘 사이로 번졌다. 그러다 문이 열리면 서로 입을 다물었다. 손님에게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다. 돌아서면 뭘로 다퉜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남편이 잠시 손을 멈추고 아내에게 눈을 맞춘다. 

“반쪽이야. 내 반쪽. 모든 걸 의지하고 살았어. 지금까지.”

아내는 칠 남매 중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늘 품 안에서 자랐다. 힘든 일은 몰랐다. 열아홉까지는.


시집을 왔다. 큰며느리였다. 삶의 무게가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없는 살림에 시댁 오 남매의 하루가 매달려 있었다. 명절이 오고 제삿날이 겹치고 혼삿날이 잡히면 새벽부터 음식을 지고 날랐다. 시부모가 칠순을 넘길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번 돈은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빠져나갔다. 작은 몸 하나로 반평생을 건너왔다.

“째깐한 게, 어떻게 견뎠는지 몰라.”

아내가 웃는다. 웃음 끝이 짧다. 남편이 그 얼굴을 본다. 처음 만났던 모습이 겹친다. 열아홉, 눈빛이 반짝이던, 세상일을 아직 모르던 얼굴. 지금은 세월의 주름이 깊다. 어느덧 일흔둘이다.

“수고 많았어.” 아내가 고개를 젓는다. “뭘. 같이 벌어먹고 산 건데.”

아내가 창 너머로 시선을 둔다. 남편은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다. 더는 말을 잇지 않는다. 


남은 시간


손님이 떠날 때도 끝까지 배웅하는 마음.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 시절, 월급날이면 아버지들이 길게 줄을 섰다. 퇴근길,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이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봉투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과자를 받아들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센베이가 기름종이에 싸여 건네졌다. 따끈했다. 외투 주머니에 넣으면 가슴까지 온기가 번졌다. 

집에 가면 아이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 손에 들린 걸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박스째 나갔다. 집집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단내가 골목 끝까지 번졌다. 

“없는 사람은 못 사 먹었어요. 특별한 날 아니면 있는 집에서나 사 갔지.” 

단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처음 문을 열던 날부터 발길을 끊지 않은 단골도 있다. 부부는 살면서 몇 번이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때마다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단골들이 못 찾을까봐, 될 수 있으면 가깝게 있으려고 했지.” 

삼십 년을 버틴 자리를 떠나 이 골목으로 흘러왔다. 그 시간도 벌써 이십 년을 훌쩍 넘겼다. 이제는 자식이 대신 온다. 한 손님이 어머니가 이 집 과자만 드신다며, 봉지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든다. 서울에서 온 손님은 과자 한 봉지에 와인 한 병을 곁들여 가방에 넣는다. 국민학교 동창들을 만나러 간다며, 오래된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다 웃는다.


동인천 일대가 달라지고 있다. 낡은 간판들이 하나둘 내려오고, 이 자리도 머지않아 새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더 정직하게, 더 소중하게 마무리해야지.”

“그래도 그 집에서 사 먹을 때가 좋았다, 이 말 들으면 돼요.”

부부가 나란히 앉아 오래된 쇠판을 닦는다. 오십 년을 함께한 무쇠는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 굳은살 박인 손에 말없이 익숙해진 무게다.

“후회할 일은 없어요. 돌아보면, 그래도 참 잘 살았지 싶어.”

겨울 해는 짧다. 어느덧 창밖에 어둠이 내린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과자 한 봉지를 들고 골목으로 걸어 나간다. 그 옛날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부가 나란히 앉아 오래된 쇠판을 닦는다. 오십 년을 함께한 무쇠는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 굳은살 박인 손에 말없이 익숙해진 무게다.

“후회할 일은 없어요. 돌아보면, 그래도 참 잘 살았지 싶어.”

겨울 해는 짧다. 어느덧 창밖에 어둠이 내린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과자 한 봉지를 들고 골목으로 걸어 나간다. 그 옛날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인천, 그때 그 시절

•1960년대 중반, 동인천역에서 경동사거리는 인천의 중심지였다. 1950년대 향토백화점이 들어섰고, 은행만 네 곳, 영화관과 결혼식장, 도서관, 병원이 모였다. 싸리재에는 양복점만 서른 곳이 넘었다.

•1970년, 인천 인구 65만 명. 그중 26만 명이 중구·동구에 살았다. 열에 넷이 이 동네를 오갔다.

•1985년 인천시청 구월동 이전, 1997년 IMF, 1999년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제일이었어. 인천사람들이 동인천역 앞에 다 모였지. 구월동?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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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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