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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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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5 2026년 11월호

저녁 배


사진가 김재겸 반세기를 건너 아차도에 닿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재겸 사진가


창문을 열면 바다였다.

물때가 되면 그물 당기는 ‘어야디야’ 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봄이면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모래장술을 새우로 하얗게 덮었고,

가을이면 장정들이 새우젓 드럼을 배에 싣고 떠났다.

배가 멀어지면 섬에는 적막이 흘렀다.

섬은 사람들이 왔다가 떠나는 곳이었다.


열두 살 되던 해, 그도 섬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뱃놈’이 될까 두려워 그를 화평동 큰아버지 댁에 맡겼다.

아이는 공부 안 해도 좋으니 집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쓴 끝에

닷새 만에 섬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튿날 아침, 아이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시 배에 올랐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예순 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아차도 선창 앞바다.

밤새 닻을 내리고 있던 배가 출항을 앞두고 불을 밝힌다.


그 불빛 앞에, 사진기를 든 한 사람이 서 있다.



아차도 바닷가, 2025


고향 나무, 2012


집으로 가는 길, 2025



저기쯤 아차도



라디오에서 자동차 경적과 ‘부르릉’ 엔진 소리가 흘러나올 때면,

섬 소년의 마음은 마니산 너머로 달려갔다.

처음 섬을 떠나던 날은 들떠 있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 설레던 마음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학교 가는 길도 교실도 모두 낯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섬으로 돌아온 그를 어머니는 ‘왜 왔냐’는 듯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소년은 바닷가에서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연락선으로 옮겨 탔다.

집 모퉁이에 숨어 아들을 지켜보았을 어머니의 마음을, 그는 한참 뒤에야 헤아렸다.

훗날 그날 일을 여쭈었을 때, 어머니는

‘받아주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가 날 받아주었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화평동에서 자유공원은 가까웠다. 종종 그 언덕에 올랐다.

고향 생각이 나는 날이면 맥아더 동상 앞에 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저기쯤, 아차도가 있겠지.’


방학이 다가오면 집에 갈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섬에서는 도시 학교에 다닌다고 친구들 앞에서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개학을 앞두고 인천으로 떠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배터에 나와 배웅했다.

학용품 사는 데 보태라며 꼬깃꼬깃한 돈을 손에 쥐여 주는 어른도 있었다.


몇 해 전 고향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너 여름 방학 때 왔다가 다시 인천 간다고 하면,

배 못 가게 태풍 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거 아냐?”

“난 도시에 나와서 공부한다고 잘난 체나 하고 다녔는데,

친구들은 내가 떠나는 게 서운했던 겁니다.”



안개 속 뱃길, 2026


아차도, 눈 오는 날, 2025



안개 속 뱃길


아버지는 본래 새우잡이 배를 탔다.

돛을 달고 노를 저어 나가던 그 배가 1962년 태풍에 가라앉았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려고 만들어 둔 연 얼레를 잃은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 뒤로는 새우잡이 배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작은 배를 사서 고깃배들이 잡은 생선을 실어 날랐다.

4.9톤, 10마력 엔진을 단 운반선 ‘경복호’였다.

화수부두에는 먼바다로 나가는 커다란 중선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버지의 배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생선을 넘기고,

식량과 담배, 술 궤짝을 실은 뒤 다시 바다로 나갔다.

소년은 등록금과 책값, 생활비를 받으러 부둣가로 나갔다.


인천에 오면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삼화목욕탕에 갔다.

“얘야, 너는 목욕할 때 때를 너무 빡빡 닦지 말아라….”

병치레로 뼈만 앙상한 아들을 섬으로 데려가고 싶었다고,

학교고 뭐고 다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고, 아버지는 훗날 털어놓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세 번 비켜 갔다.

판검사가 되라는 바람에는 자신이 없었고,

공고에 가라고 할 때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으며,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할 때는 공대를 택했다.

“그리고, 그 짐은 모두 아버지가 짊어지셨습니다.”


—

아버지의 배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날, 바다에 안개가 자욱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항로를 일러 줄 장치도, 길잡이가 되어 줄 부표도 없던 시절이었다.

배를 몰던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얘야, 삿대를 들고 뱃머리로 가서 바닥이 닿는지 짚어 봐라.”


이제 그 바다를 오가는 배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그를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그가 사진기를 든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뱃길이 이어진다.

‘아버지의 길’이다.



 

어머니, 2022


썰물, 2026



숨어 있는 아차도



열두 살에 섬을 떠난 뒤로, 그는 어머니가 지어 주는 밥을 먹고

어머니가 빨아 준 옷을 입으며 살고 싶었다.

그 바람을 이룬 것은 환갑을 훌쩍 넘겨, 평생 붙들고 있던 일을 내려놓은 뒤였다.


섬집은 어머니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 곁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동네 어른들께 드릴 선물을 잔뜩 사 들고 갔다.

고기잡이하는 이웃들의 배에는 소주를 한 상자씩 실어 주었다.

섬에서 대대로 내려온 인사법이었다.


어머니에게 밭작물을 심고 가꾸는 법을 하나하나 배웠다.

함께 심은 들깨를 털고 나니 소출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한 톨이라도 흘릴까 조심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안에 가서 키 좀 찾아오렴.”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키였다.

어머니가 키를 까부르자 검불은 날아가고 들깨만 소복이 남았다.

고소한 냄새가 번졌다.

그날의 어머니가 그의 사진 속에 남았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참 행복했습니다.”


—

고향 친구가 바닷가에서 갓 딴 굴을 그의 입에 넣어 준다.

짭조름한 바다 향이 입안에 퍼진다.

김장철이면 이웃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며 담근 김치를 몇 포기씩 나눠 주고,

그는 그 김치로 겨울을 난다.


쭈그려 앉아 굴을 따는 아낙, 옹기종기 모여 배추를 버무리는 이웃들,

물때를 따라 모양을 바꾸는 갯골, 작은 배가 드나드는 선창.

그의 사진은 그 곁을 맴돈다.

섬 어딘가에 아직 숨어 있을 아차도를 찾아서.


세상이 검기울면,

아침에 뭍으로 나갔던 배가 하루를 마친 사람들을 태우고 선창으로 돌아온다.

저녁 배가 섬 앞바다에 닻을 내린다.

그는 떠나지 않는다.


김재겸 사진가

1956년 강화군 서도면 아차도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에 인천으로 건너와 인천고와 인하대 공대를 졸업했다. 무역회사를 경영했으며, 2021년 은퇴 후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2025년 포토에세이 『저기가 거긴가』를 펴냈고, 한국시각예술문화연구소 부회장으로 인천국제현대사진기획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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