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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을 추모하며
그동안 구천을 떠돌고 있는 인천 학도병들을 106명이나 찾았다. 앞으로도 전사자 찾는 일은 계속하겠지만 너희들도 영혼이 있다면 내가 하는 일을 좀 도와다오.
6·25 때 강원도 산골짝에서 죽어간 나의 인천상업3학년 동기 김윤수, 임익순, 양순혁, 김세구에게. 6·25에 담긴 인천학도병에 대한 방송(1999년 6월 25일 KBS 라디오동서남북)을 마치고 이 글을 너희들에게 바친다.
인천학도병 이경종.' 이경종씨의 현재 직함은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이다. 벌써 4년째 이 직함을 가지고 '인천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인천지역 학도병 출신들을 찾아다니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그 동안 만난 사람은 줄잡아 150여 명. 육성을 녹음해 녹취문을 만들어 놓은 것도 100여 개에 이른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육군본부, 해군본부, 전쟁기념관, 동작동 국립묘지 등의 서류를 확인해 인천학도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이가 106명이나 된다는 것을 밝혀내고 320여 명의 생존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천학도병의 얘기가 하나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다. 정부에서 6·25 참전용사증서를 발급해 준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아픈 허리를 이끌고 병무청까지 찾아가 '6·25 참전용사증'을 발급 받았다.
전쟁으로 허리 부상을 당해 이제껏 일년이면 한 두 0차례씩은 누워지내야 하는 신세지만 전쟁에 참가했던 것에 대해 무엇하나 바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증서를 받고 보니 전쟁에 참가해 잃은 것은 너무나 많은데 비해 얻은 것이라곤 이 증서 하나뿐인가 하는 허탈감을 느꼈다. 그는 증서를 보여주며 허탈한 심정을 아들 이규원씨에게 털어놓았다.
며칠후 이경종씨는 아들로부터 4쪽짜리 문서 하나를 받아들었다. '인천학도의용대의 활동과 6·25 참전사' 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아버지가 아쉬워하는 잃어버린 세월을 찾으려면 인천의 학도의용대 활동을 정리하는 역사책을 편찬해 보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인이 방대한 역사를 추적해서 밝혀낸다는 것이 너무 힘에 겨울 것 같아 아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하지만 말없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추모비 하나라도 제대로 세우려면 인천 학도병의 역사를 제대로 밝혀내야 한다는 설명에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아들 이규원씨가 편찬위원장을 맡고 실무는 이경종씨가 편찬위원이 돼 일을 한번 저질러 보기로 한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인천학도병의 역사가 이규원씨와 이경종씨의 노력으로 하나씩 밝혀지고 잃어버린 역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츰 드러나는 학도병의 역사를 그들만 독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월간 '서해문화'라는 잡지를 발간해 98년 2월부터 '인천학도병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있다. 사실 인천 학도의용대의 역사는 희미하나마 기록에 남아있었다. 지난 1959년에 인천 학도병 위령제를 거행했다는 사실이 <인천신보> 1959년 12월 24일자에 게재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추모제의 맥이 끊어져버린 것은 물론 위령비나 추모비 하나 없다. "수봉공원에 재일 학도의용군 6·25 참전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 학도의용대에 관한 위령비나 추모비 하나 없다는 것은 인천의 수치입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동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종교방식대로 성니꼴라오회에 등록해 지속적으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는 이경종씨는 편찬위원장인 이규원씨와 더불어 인천학도병 위령제를 준비해 구천에서 떠돌고 있는 옛 동료들의 넋을 위로할 계획이다. 요즘 들어 그는 부쩍 더 바빠졌다.
그가 87년부터 옛 전우들을 만나 당시의 증언을 녹취하고 정리한 내용 그리고 사진자료들을 모아 6월 17일부터 24일까지 인천시청 중앙홀에서 '인천 학도병 6·25 참전기록 전시회'를 준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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