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부평에 온천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 되었다
이야기 하나
온천은닉죄로 현(懸)으로 강등
수주(樹州)는 부평의 옛 이름이다. 고려중엽 이곳에는 온천이 있었다.
그 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개경의 고관가족들이 자주 찾았다.
그런데 높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자 주민들의 피해가 커졌다. 수주사또는 고관이 내려 올 때마다 그들은 대접하기 위해 필요한 쌀, 닭, 소, 돼지 등을 고을 주민들에게 배당하여 거둬 들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을 위해 길을 닦기도 하는 등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난리가 일어났다. 사또와 관리들은 도주했고 주민들도 피난을 갔다. 어느정도 난리가 평정되자 주민들은 재빨리 돌아와 그 온천을 묻어버렸다. 주민들은 절대로 온천의 위치를 말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
그후 수백년이 지나 조선 세종때 부평의 온천을 다시 복원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세종은 등에 종기가 심하게 났고 책읽기를 좋아해서 시력이 극도로 쇠약했다. 승지등은 상감의 병환을 치료하는데 '온천욕'이 좋다고 진언했다. 세종은 온양온천으로 행차하여 목욕을 하고 돌아온 후 많은 효과를 보았다. 온천욕에 효험을 본 세종은 한양에서 가까운 부평에 온천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 좋아했다. 곧 온천을 탐색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세종22년(1440) 8월 임금은 온천탐색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 예조에 다음과 같은 비상조치 명령을 내렸다. '금년말까지 기한을 줄 터이니 그때까지 고하지 아니하면 수리와 관원은 경기지방의 변두리 지역으로 전출시킬것이며 자기 집터나 논밭에 온정(溫井)이 있음에도 이를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타향으로 내쫏을 것이라'
이에 앞서 세종20년(1438), 온천을 은닉했다고 부평은 도호부에서 현(縣)으로 강등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세종은 부평온천탐색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 노고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세종은 온천발견에 가망없음을 알고 비상조치를 해제하고 다시 부평을 도호부로 환원시켰다.
그럼데 인조 15년(1637) 부평고을에 괴변이 일어났다. 어느날 갑자기 10여리의 길이 꺼져버렸다. 사람들은 귀신이 장난이라고 겁을 먹고 제를 지내고 빌었다.
땅이 꺼져버린 것은 아마도 부평온천을 찾기위해 도처에 수백개의 우물을 파내고 다시 물을 메워놓지 않았기 ?문에 땅이 가라앉아 버린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부평읍지>에 富平有溫泉 今皆廢止(부평에 온천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쓰여있는데 수세기가 지난 지금가지 부평의 온천은 흔적조차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 둘
남자 많이 태어난 수봉산 주변
수봉공원이 있는 수봉산(壽峯山)의 원래 이름은 水峯山이었다. 이 산은 계양산과 같이 서해에서 떠밀려 왔다는 전설이 있다. 아마도 먼 옛날 이 산 주위에가 바다였기 때문에 이런얘기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산은 주안산(朱雁山)의 한 줄기로서 동쪽 산줄기 외에는 삼면이 평지로서 옛날에는 바닷물이 그 주위로 넘나들어 물속에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개항도기 이전에는 중구, 동구, 남구의 주안동 ㆍ도화동 등이 한 개의 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 면의 이름은 다소면(多所面). 수봉산의 동쪽 다소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소란 물웅덩이(多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시가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정에는 수자원이 풍부해서 좋은 논이 많이 있엇다.
또한 수봉산 기슭에는 '다랭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는 다랑(多郞) ㆍ다남(多男)의 뜻으로 이 마을에 남자가 많다는 뜻이다. 수봉산을 정기가 좋아서 주변 마을에는 남자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수봉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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