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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인천, 자유수호를 위한 디딤판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미국, 영국 등 연합군 함정 260여 척과 한국 해군의 초계함 4척 그리고 미 제 1해병사단, 미 제 7보병사단, 국군 해병 제 1연대 등 7만5천 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와 인천시가지에 쏟아 부은 포탄만도 2천845발이었다. 월미도는 예닐곱번 뒤집어졌고 인천은 완전히 불바다였다. 이어 상륙정을 앞세우고 육지에 도달한 해병대원들은 시내에서 패주하는 인민군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작전 개시 12시간 후에 유엔군 비행기는 인천 시내에 전단을 살포했다. '인민군 장병에게 알린다. 강력한 유엔군 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전진 중이다… 즉시 유엔군에게 항복하라. 맛있는 음식과 치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5천대 1의 도박확률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도박'이라고 일컬어진다. 그것도 5천대 1의 확률이었다. 인천은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여러 가지 불리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곳의 하나이며 썰물 때는 6㎞ 넘는 갯벌이 펼쳐지기 때문에 대 부대의 접근이 수월치 않았다. 또한 항구로 들어가는 물길이 좁고 굴곡이 심하며 해안은 대부분 4~5m에 이르는 높은 방파제와 해벽으로 둘러 싸여있어 평상시에도 배를 육지에 접안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D데이였던 9월 15일은 달의 위치로 인해 간만의 차가 9.6m에 달해 작전을 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미국통합참모본부도 인천상륙작전을 강력히 반대하며 상륙지로 군산을 종용하고 나섰지만 맥아더는 '크로마이트(Chromite) '라는 암호로 작전을 결행한다. 그는 세계대전史에 한 획을 그은 대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6.25 전쟁의 전황을 일시에 바꿔놓았다. 그 여세를 몰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계속 북으로 향해 만주 벌판에 다다르게 된다.
노병은 자유공원에 살아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고 퇴임식에서 연설한 맥아더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인천의 자유공원에 살아있다. 그는 월미도와 인천항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공원 마루턱에 청동상이 되어 우뚝 서있다. 군복을 입은 채 망원경을 목에 걸고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7주년이던 1957년 9월15일에 세워졌다. 동상 밑에는 참모들과 함께 인천 앞 바다로 걸어들어 오는 모습을 조각한 부조가 있다.
자유공원은 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공원으로, 맥아더동상이 세워지기까지는 만국공원으로 불렸으나 맥아더가 그곳에 세워진 그해부터 '자유공원'으로 명명되었다. 올해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조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시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미국 등 해외참전용사 및 가족 2천여명을 초청하여 월미도 등 전적지를 방문한다. 상륙작전에 참가해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인천 앞바다에서의 해상 헌화 그리고 맥아더 장군 동상에 헌화도 예정돼 있다. 이밖에 학술세미나와 사진전을 개최해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조명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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