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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은 가슴에, 인천은 제2의 고향
황해도가 남한과 가까운데다가 38선이 그어질 당시 황해도 옹진군과 연안군 일부가 남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족단위로 미군 군함과 선박 등을 이용해 인천으로 쉽게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인천에 살고 있는 실향민은 황해도 출신이 45만명, 평안남도 7만, 함경남도 3만, 평안북도 5만, 함경북도 1만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의 인구가 250만이므로 전체 인천인구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광복 이전에 경성이나 인천에 유학을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경우이고 두 번째 경우는 해방직후 38선이 생기면서 정치적 이념 등을 이유로 자진 남하한 이들이다. 세 번째 부류는 6·25 전쟁이후 1·4후퇴 때 내려온 피난민으로 인천에 살고 있는 많은 수의 실향민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자진 남하한 이들은 월남후 6·25전쟁 직전까지 '서북청년회' '이북학생총연맹' 등을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자리를 잡은 반면 피난민들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UN 연합군이 진군하던 때 피난을 내려온데 이어 1·4후퇴때 많은 이북 주민들이 월남을 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6·25전쟁이 끝나면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과 가까운 인천과 서울, 강화지역에 몰려서 살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고착화되자 실향민들은 인천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구도심으로 불리는 중구와 동구 일대였다. 동구 만석동과 송현동, 중구 북성동, 송월동, 답동 등이 그곳이다. 이후 도시개발이 이뤄지면서 인천시는 이들을 남구 용현동(일명 독쟁이)과 학익동, 신기촌 등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월남한 실향민들은 인천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만의 끈기와 오기로 나름대로 인천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이 인천을 찾은 후 50년이 흘렀다. 이들은 각기 출신도별로 도민회를 조직해 서로간의 친목과 우의를 돈독히하며 망향의 꿈과 서러움을 달랜다. 또 후손들을 위해서 장학기금을 마련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옹진군 교정면민회의 경우는 장학기금으로 4억여원을 마련해 놓고 이곳 출신 2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바라보는 인천 실향민들의 시각은 남다르다. 그 동안 북한에 대한 믿음이 없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말로만 그칠줄 알았는데 실제로 반세기만에 이산가족이 서로 얼싸안는 모습을 보며 이제 나도 가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이산가족문제가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자 전원이 생사확인을 비롯해 우편통신 허용, 상설면회소 설치, 자유왕래 등이 우선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리운 고향을 가슴에 묻고 나와 나의 자손이 뼈를 묻을 곳 인천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인천광역시민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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