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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안데르센 동화책에서 본 듯 한 집

2001-05-12 2001년 2월호

옛 창영동 거리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점차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곳은 한때 개화의 물결이 스쳐 지나간 현장이다.

'쇠뿔고개라 불리던 우각리에서 우리나라 철도가 처음 개통되었고 그 인근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베이스캠프를 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그 때 세상 돌아가던 모습을 잠시 보자. 1885년 4월 5일, 봄비 내리는 부활절 오후 3시경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앞 바다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땅을 밟았을 때 서울은 갑신정변(1884년)으로 청.일간의 대립속에 어수선했다. 부인을 대동한 아펜젤러는 신변 안전문제로 서울 입성이 여의치 않아 일단 언더우드만 서울로 올라갔다.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도로 건너갔다가 같은 해 6월 21일에 다시 인천으로 들어왔다. 7월 19일 그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종교집회, 즉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제물포교회(현재 내리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미국감리교선교회를 비롯해 외국의 개신교 선교회에서는 경쟁하듯 우리나라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지금도 야트막한 언덕에는 그때의 상황을 말해주는 건물 한 채가 남아있다.

현재의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은 100여 년전에 감리교회 여선교사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고풍스런 서구식 건물이다. 1892년 인천으로 부임한 내리교회 존스(한국명 조원시)목사가 이듬해 인 1893년에 선교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입했다.

1905년까지 3채의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선교사 숙소는 1894년에 준공했다.

복지관 옆, 지금의 동인천세무서 자리에는 남자선교사들의 사택이 지어졌고 옛 한전사택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이 들어섰다.

왜 존스 목사는 이곳에 선교 베이스캠프를 쳤을까? 무엇보다 교통이 좋았기 때문에 이곳을 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내로 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했으며 서울로 갈 수 있는 철도가 놓여져 있고 또한 그 당시 고종과의 친분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알렌 박사의 별장이 인근(옛 전도관 언덕)에 있었던 것 등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142평 짜리 붉은 벽돌로 북유럽 양식을 띠고 있는 이 건물은 마루가 깔린 복도를 따라 아래 윗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물매가 매우 가파른 양철지붕과 오르내리 창문은 이 건물의 외양을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서구 동화책에 그려져 있을 법한, 앙증맞게 생긴 집이다.

창문은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에서 사용했던 '용(用)' 자 창호살 형태를 응용했고 가장자리는 교살 등의 문양으로 짜 넣은 것이 눈길을 끈다.

토착문화와의 융합을 통해 초기 선교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의도도 숨겨진 듯하다.

이 건물은 1949년 4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헬렌 보일즈에 의해 '인천기독교사회관'으로 창설되어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징발되면서 폐쇄되었다.

그후 1959년 4월 다시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지시설로 개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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