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관광

'사교장에서 박물관까지' 한 세기 질곡의 역사 품다.

2001-05-15 1999년 6월호

"많은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앨런박사 부인이 은제 열쇠로 신관의 문을 열었다. 내빈들이 훌륭한 집의 장식을 두루 구경하며 칭찬했다. 영국영사 허버트 고프씨는 구락부 건축에 대한 경과보고와 사바틴(러시아인)과 데슐러(미국인) 그리고 륄르스(독일인)에게 그 동안 건축에 대한 노고를 치하했고 이어 앨런부인에게 구락부 개관선언을 해주기를 간청했다"

1901년 6월 <코리아 리뷰> '이달의 뉴스' 중에서. 개항이 되자마자 구미 각국을 위시해서 일본과 중국에서 외교관과 상사직원들이 대거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서로의 친목을 돕기 위해 사교클럽을 만들었다. 1891년 우선 관동에 있던 서양식 목조건물에 '제물포구락부'를 설립했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초기에는 미 영 불 독 등 서양인 6명, 일본인 24명, 중국인 4명으로 출발했다. 당시 이 구락부의 회원가입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는데 회원들의 투표로 입회를 결정했다고 한다. 10년 후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응봉산 기슭을 깎아서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했다. 이 건물에는 당구대 사교실 도서실 등을 갖추고 있었고 마당에는 테니스코트도 있었다. 이 신축건물이 바로 현 중구 송학동 1가에 있는 인천문화원이다. 아래층(32평)이 윗층(85평) 보다 면적이 적은 가분수 형태의 벽돌조 2층 건물이다. 경사면에 세워졌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지상 1층 지하 1층의 건물로 보인다. 2층으로 들어가려면 건물 옆에 나있는 돌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건물의 외향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지만 창문과 지붕 모양은 서구풍을 물씬 풍긴다. 이 건물에서 보면 인천항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금발의 신사가 이층 창가에 걸터앉아 석양볕을 쬐며 책을 읽는 모습이 금방 그려진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1908년 12월, 제물포구락부와 결별하고 그들만의 '인천구락부'를 결성한 후 서양인들만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후 1913년 조계(租界)제도가 철폐됨으로써 일본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가 건물의 안방을 차지하고 이름을 '정방각(精芳閣)'으로 불렀다. 이어 재향군인 부인회관으로 사용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34년에 인천부청(府廳)에 기증한다.

해방 후 주한미군이 장교클럽으로 이용하다가 47년 10월 미군이 철수 한 뒤에는 대한부인회인천지부가 차지하고 예식장과 다방 등을 겸했다. 한국동란 때는 북한군의 한 부대가 그곳을 점령해서 본부로 사용했는데 전쟁 중에 내부는 완전히 훼손됐다. 다행히 함포사격 때 폭격당하지 않아 외양은 멀쩡했다.

인천이 유엔군에게 재수복된 후 미군이 사병클럽으로 써오던 중 미술평론가 이경성씨가 미군과의 교섭 끝에 1952년 7월 이 건물을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할 것을 허락받는다. 그러나 내부장식과 진열품이 준비가 미비된 관계로 개관이 늦어지자 그 짬에 시의회와 시교육청이 각각 회의실과 청사로 사용했다.

두 기관이 각각 청사를 마련하고 그 자리를 비워준 후 53년 4월 1일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인천시립박물관'의 문패를 걸 수 있었다. 지난 90년까지 시립박물관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박물관이 옥련동으로 이전하면서 '인천문화원'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게 된다.

지난 93년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문화원을 찾은 날, 1층 방에서는 그 건물이 품고 있는 질곡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중년부인 대여섯명이 묵향을 피우며 한가롭게 사군자를 치고 있었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