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관광

왜군과 명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古城

2001-05-16 1999년 7월호

한눈에 봐도 전략적 요충지다. 산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북쪽으로는 한강과 행주산성 그리고 일산 신시가지가 건너다 보인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과 야트막한 산봉우리 그리고 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김포평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마치 잠자리 떼 같다. 앞에 거칠 것이 없는 시야다.

계양산(394.9m)은 부평의 진산(鎭山)으로 옛날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산(安南山) 등으로 불리었다. 이 산은 멀리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는데 건너편에 있는 큰 산 마니산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때 임꺽정이 계양산 기슭과 인근의 장명이 고개를 소굴로 삼았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진다.

계양산성은 제일 높은 봉우리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봉(主峰)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에워싸는 형상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8부 능선, 즉 표고 202m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쌓아져 있는데 불쑥 튀어나온 능선 따라 축조돼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된 특이한 성이다.

'부평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서 석축둘레가 1,937척이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이 산성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곳은 한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으로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계양산성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방어를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쌓은 것이 아닌가 추정되지만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후 조선 세조 때 부평에 병방(군기지)을 설립할 당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재건했다고 해서 한때는 '이성(李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은 계양산성을 '고생살이'라고 부르는데 고성산(古城山)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계양산성에서의 전투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성의 일부를 다시 쌓고 명나라 군대와 싸웠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인근에서 행주대첩 등의 전투가 벌어진 것을 볼 때 이 성에서 왜군과 명군의 전투 가능성은 높다.

임진왜란 이후에 계양산성은 완전히 폐성으로 남는다.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계양산성 안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근래까지 부평읍민들이 이 묘지를 이용했고 현재도 성내 완만한 구릉지는 대부분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둘레 약 1,180m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없다. 정자가 세워져 있는 아래 부분 등 일부구간에서만 옛 성터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성벽은 흙을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았는데 돌은 대체로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높이가 비슷한 장방형 석재이다. 이들 석재는 성내에 현재 일부 남아있는 바위산의 석질과 같으며 이곳에서 채석한 흔적도 남아있다. 이로 보아 성을 쌓는데 사용한 석재들은 멀리서 운반해 온 것이 아니고 주변의 바위를 깨서 사용하거나 자연석을 채취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성내에는 장대(將臺), 망루, 창고, 성랑(城廊) 그리고 사찰 등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지금 지표 상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8-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