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자폭으로 맞선 김상용의 넋 머문 곳
강화읍에서 찬우물고개를 넘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길로 향하면 얼마 안가 태극 문양이 그려진 대문이 세워진 한옥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고즈넉한 기와돌담으로 둘러쳐진 고택(古宅)의 마당에 들어서자 정갈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분위기에 금방 옷매무새를 매만지게 된다.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자리잡은 충렬사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강화 역사의 생채기가 이곳 충렬사(忠烈祠)에도 한 줄 깊게 패여 있다.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1636~1637) 때 김상용 선생은 급히 종묘의 위패를 안고 봉림 인평대군 그리고 조정대신의 식솔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 온다. 그러나 청군은 허술한 수비를 틈타 80여척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와 노략질과 약탈을 자행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상용은 적의 손에 잡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느니 죽음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하여 강화 남문에 올라 그곳에 쌓아 둔 화약더미에 불을 붙이고 자폭하여 온몸으로 항거한다. 이곳에 사당이 세워진 유래로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선원이 순절한 후 그의 육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옷자락 한 조각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남문에서 10여리나 떨어진 이곳 선행리에 그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됐다. 이를 기이 여긴 후손들이 이곳에 사당을 지었다. 1641년(인조 19년)에 건립한 이 사당은 당초에 현충사라 부르던 것을 효종 9년(1658년) 충렬사란 사액이 내려져 오늘에 이른다. 김상용 선생 외 병조판서 이상길 등 26위를 모신 충열사에서는 매년 10월에 이들의 넋을 기리는 제향을 올린다.
김상용은 선조 23년에 문과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한 후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란이 줄을 이었던 난세 속에서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의 형으로 당시 두 형제의 충절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들의 충절은 조선 후기 내내 안동 김씨 가문이 활짝 피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세기 세도가의 핵심 인물인 김조순은 김상헌의 7대손이다.
강화읍 관청리에는 김상용 선생과 관련있는 기념물이 하나 더 있다. 고려궁지로 오르는 길 우측에 1698년에 후손인 김창국이 당시 남문 터에 순의비(殉義碑 시 기념물 제 35호)를 세웠다. 후에 비문의 글씨가 마멸되자 새 비를 세우고 옛 비를 그 밑에 묻었는데 고려궁터 진입로 확장공사 때 비각을 옮기던 중 원비가 출토됐다. 현재는 두 개의 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아직도 김상용 선생의 충의가 살아있는지 국가에 재난이 있을 때면 비석에 땀이 흐른다고 전해진다. 찾아가는 길 강화대교를 건너 읍내로 들어가기 전 전등사 가는 길 (84번 도로)을 탄다. 찬우물고개 바로 못 미쳐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조금 달리면 오른쪽에 충렬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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