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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씨의 뿌리가 박혀있는 곳
원인재(源仁齋)는 인천(인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의 제사를 지내던 12간 짜리 재실이다. 이 건물이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원인재기>에 의해 순조 7년(1807년)이나 고종 4년(1853년) 경으로 추측할 뿐이다.원인재라는 명칭은 '인천 이씨 각파의 근원'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원인재는 원래 연수동 적십자요양원(현 적십자병원) 부근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주변이 택지로 개발되자 승기천변 이허겸의 묘역으로 이전됐다.
인천 이씨의 뿌리는 가야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성은 원래 허(許)씨였다. 가야국 김수로왕과 인도에서 온 허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의 후손들로 어머니의 성을 따 허씨가 됐다.
그후 그들의 성은 다시 이씨가 되는데 그 연유는 이렇다. 이허겸의 10세조 허기(許奇)는 당나라와의 국경지대인 신주(현 황해도 신천군)로 전방최고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병마사로 부임한다. 이때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 당나라 현종은 피난을 다니는 처지에 놓였다. 신라의 경순왕은 급히 허기를 중국에 보냈는데 그는 거기서 공을 세운다.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자 현종은 허기에게 자신의 성인 이씨를 내린다. 이에 신라왕은 당시 미추홀을 소성(邵城)으로 바꾸고 허기를 그곳의 장관으로 임명한다. 당시 소성은 능허대를 통해 중국의 사신들이 드나들던 통로였고 충남 태안반도 이북의 해상지역을 관할하던 전략요충지였다. 거들먹거리던 중국 사신들도 소성에만 오면 머리를 조아렸다. 중국 황제의 성을 가진 허기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천 이씨는 이허겸이 고려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고려의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고 인천은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 불리웠다. 칠대어향은 인천이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동안 왕의 외향(외가고을)이거나 왕비의 내향(친정고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칭호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퍼스트레이디를 다수 배출한 명문지역이다. 이런 연유로 인천은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고 후에 인주(仁州)로 변경된다.
이허겸의 묘지는 본래 섬이었다. 흡사 물위에 떠 있는 연꽃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혔다. 무엇보다 부수지에 묘가 들어섰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이 명당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 한가운데 놓이게 됐다. "묘지의 형세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풍수지리상 주변에 연못을 파야합니다." 원인재에 기거하면서 문중의 족보나 관련자료를 연구하고 있는 인천이씨대종회 상임이사 이규복 씨의 설명이다.
지난 90년 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원인재는 연수2동 584번지로 단지 이전 복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8백여평 터에 7개 동의 부속건물을 함께 세우고 있다. 이번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원인재가 인천 이씨만의 것이 아닌 인천시민 모두의 것이 되도록 재건축 청사진을 마련했다고 한다.
94년 4월 5일부터 이전 복원작업을 시작한 원인재는 현재 조경작업 등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제 지하철이 개통되면 원인재는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에 '원인재역'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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