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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자상(像) 봉안한 향교

2001-05-21 2000년 11월호

향교는 조선시대 때 각 군과 현에 설치되어 공자 등 옛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유생과 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을 한 교육기관이다. 강화군에는 '교동도'란 섬이 있다. 어김없이 그곳엔 향교가 있다. 그러나 '교동(喬桐)'이란 섬 이름은 이미 신라 때 얻은 이름으로 향교 때문에 얻은 지명은 아닌 듯하다.

그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강화군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한다. 교동도는 민통선(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해병대의 출입통제를 받는다.

강화도 서북부에 있는 이 섬은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어 섬의 북쪽 해안선이 곧 남방한계선이다. 그곳은 황해도 연백군과 마주한다. 그 섬에 교동향교가 있다.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상을 중국으로부터 가져다 봉안한 유서 깊은 향교다. 고려 충렬왕 때인 1286년 유학자 문성공 안유(안향)는 원나라에 갔다오는 길에 이곳에 닻을 내려 공자의 화상을 향교에 모셨다. 이어 다시 김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 유학 성현들의 화상 10여점과 제기 등을 구해오게 했다. 이후 경향 각지에 문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왜 안유는 교동향교에 처음 공자상을 봉헌했을까. 옛날에 교동도는 중국을 오가는 바다 길목에 있어 대부분의 배들은 그곳을 거쳐갔다. 안유 역시 중국에서 돌아올 때 교동도를 거쳐야만 했는데 그곳에 있는 향교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교동도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청 격인 도호부가 설치됐을 정도로 지리적, 행정적 중요성이 작지 않았다. 교동향교는 교동면 읍내리 14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월선포에 내려 대룡리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섬의 주 봉우리 격인 화개산(해발 259m)이 봉긋 솟아 있는데 향교는 그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교동향교는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 17년(1741)에 지금의 위치인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 그 옛터는 아직도 남아 있어 그 일대를 향교골이라 부른다. 향교로 오르는 오솔길 초입에 다다르면 읍내리 비석군을 만날 수 있다.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도호부사 등의 공덕과 선정을 새겨놓은 33기의 비석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다. 비석군을 뒤로하고 향교에 이르면 붉은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옛날에 말을 타고 이곳에 왔을 경우 여기부터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향교 윗쪽에는 공자 등 유학 성현 등을 모신 대성전, 그 아래 좌우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현 위패를 모신 동·서무( )가 있다.

그 아래쪽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강의실 명륜당이 있고 그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재(齋)가 있다. 대성전을 비롯한 오밀조밀한 부속건물들이 주위의 경관과 함께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늦가을 한낮, 바다 건너 석모도의 자태가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향교 교정에는 마치 학동들 글 읽는 소리처럼 풀벌레 소리만 한가롭게 들릴 뿐이다.  

 

<찾아가는 길>

강화대교를 건너서 읍을 지나 송해면으로 향한다. 하점초등학교와 하점면사무소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창후리 방향으로 달리면 선착장이 나온다.

교동도 가는 배는 수시로 있다. 선착장에 해병대 초소가 있는데 신고서를 간단하게 기재하면 별 어려움 없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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