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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항몽의 기개 서려있는 강도 궁터

2001-05-17 1999년 8월호

고려 조정이 강화로 피난해 있던 시절에 활약했던 문인 최 자(崔 滋)가 묘사한 강도(江都) 강화의 모습이다. 고려 때 몽골이 우리나라를 침입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정은 1232년(고종 19) 6월 16일 서울(수도)을 개성(송도)에서 강화도로 옮길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불과 20여일 지난 7월 7일에 왕은 서둘러 바다를 건넌다. 너무 급하게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에 왕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임시로 강화의 한 객관(客館)에 머물렀고 부랴부랴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궁터'이다. 강화도에 새 도읍을 건설하면서 그들은 떠나 온 송도를 잊지 못해 그곳에 새로운 송도를 꾸미기 시작했다.

강도의 주산 이름을 송악산(松岳山)이라고 하고 그 자락에 궁궐을 앉혔다. 그밖에 다른 지역에는 연경궁, 수창궁, 용암궁 등 별궁을 세웠고 송악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자락 견자산(見子山) 기슭에 법왕사 같은 사찰을 비롯해 국자감, 태묘 등도 지었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무신들도 많은 사람을 동원해 송도에서 목재를 실어와 견자산 부근에 궁궐에 버금가는 저택들을 지었다고 한다. 강도의 건설은 군인들과 여러 도에서 모은 백성들의 힘을 빌어 고종 21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공사는 몽골의 제 3차 침입이 시작되는 고종 22년 이전까지는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현재 고려궁지는 너무 협소할 뿐 아니라 그곳에는 고려에 대한 흔적이 거의 없다. 39년간 몽골에 줄기차게 항전했던 궁궐터는 1270년 5월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궁궐과 성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 없어졌다.

'사적 제 133호 고려궁지'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덩그마니 세워져 있고 터를 발굴하다만 흔적과 그곳에서 나온 듯한 기와조각만 쌓여 있을 뿐이다.

항몽(抗蒙)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실체물이 없다는 게 서운하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조선시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고려가 떠난 그 자리에 조선시대의 강화 유수부(留守府) 청사가 들어섰다.

'明威軒(명위헌)'이란 편액이 달려 있는 건물이 바로 동헌(東軒 시 유형문화재 25호)으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됐다. 현재는 정면 8간 측면 3간 구조 한 채만 남아있다. 명위헌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강화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가 1975년에 복원됐다.

고려궁터 남쪽으로 지대가 약간 낮은 곳에 이방청(吏房廳 시 유형문화재 26호)이 자리잡고 있다. 지방 관아 중의 하나인 이방의 집무장소였던 이방청은 온돌방이 8간, 마루방이 12간, 부엌이 1간으로 모두 78평 가량되는 'ㄷ'자형 건물이다. 1654년 효종 5년에 건립해서 정조 7년(1783년)에 개수했다. 한때 이방청은 강화등기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조선의 역사를 품고 있는 유물을 하나 더 볼 수 있다. 1711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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