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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

2001-06-08 2001년 6월호

   동구 창영동 37-1에 있는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5월 6일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3명의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이틀 후 학생은 6명으로 늘어났다. 설립 당시의 학교이름은 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로서 개교한지 올해로 95년이 된다. 막상 학교는 설립되었지만 인천공립보통학교는 교사(校舍)가 없어 인천관립일어학교의 교실 한 칸을 빌려 수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용동에 있던 사립 제령학교가 운영난을 겪자 대부분의 학생을 인계 받음으로써 학생수는 74명으로 늘어났다. 그후 계속 학생수가 늘어나자 12월 9일에 현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우각리(쇠뿔고개) 마루턱에 목조 건물 1동을 신축하였다. 이 교사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건재했다.
   1910년 3월 26일 첫번째 졸업생 18명을 배출하면서 학교의 기틀을 점점 잡아갔다. 늘어나는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20년부터 교사 건축계획을 세워 지방비 5만원, 한국인 유지들의 기부금 2만5천700원 등 총 공사비 14만8천 원(圓)을 들여 1924년 3월 31일 드디어 총 건평 700여 평의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 짜리 교사를 지었다. 이 건물이 바로 현재 창영초교 교사의 중심부이다. 이어 26년과 34년에 각각 서측과 동측에 교실을 증축하여 교사 중심부에 연결함으로써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92년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된 창영초교 교사는 옛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전반기에 유행하던 건축양식으로, 선과 면을 강조한 일자형 단순배치형태로 지어졌다. 이쪽 교실에서 저쪽 끝 교실까지의 길이가 100여 미터는 족히 될 만한 긴 건물이다.
   현관은 홍예문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 같은 홍예 형태는 이층 양쪽 복도 끝 등 교사 곳곳에서도 볼 수 있다. 현관에서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나무로 돼 있으며 어른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만큼의 비좁은 통로이다. 창은 아치형이며 창문은 오르내리창을 하고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지붕 아랫방을 밝게 하기 위해 설치한 지붕의 도머(Domer) 창이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등 격동기를 몸소 겪은 건물답게 외벽 군데군데 총탄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교실 내벽은 원래 갈대심이나 나무 졸대심을 넣고 흙으로 바른 후 횟칠을 했으나 현재는 석고보드로 마감했다.    
   개교 한 세기를 눈앞에 둔 창영초등학교는 현재까지 총 4만 명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했다. 고미술사학자 고유섭(9회),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10회), 서울대 총장과 부흥부장관을 역임한 신태환(18회), 파월훈련 중 부하들을 위해 산화한 강재구 소령 (40회) 등이 창영 전당(殿堂)을 거쳐간 이 시대의 동량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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