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서구열강과 통상조약 맺은 외교사의 첫무대
'꽝! 꽝! 꽈앙-'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대포소리가 인천 앞바다에서 들려왔다.
고종 19년(1882) 4월 6일 (양력 5월 22일),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미국 스와타라함은 21발의 축포를 쏘아댔다. 화답이라도 하듯 조금 떨어져 정박하고 있던 청국 군함에서도 15발의 대포를 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 조인된 것을 알리는 대포였다. 조약체결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도진 언덕에서 우리나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미국의 슈펠트제독 간의 회담 후에 이뤄졌다.
이 자리에는 청나라의 마건충과 정여창도 함께 했다.
화도진은 현재 동구 화수동 128 163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다.
외국함대와 상선이 인천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자 조선정부는 고종 16년(1879)에 인천과 부평에 강화도의 석재를 이용해 각각 진(鎭)을 설치했다.
"이 두고을은 한양 가까이의 중요한 지대이며 바다 어귀의 요충지다. 포대를 쌓고 진을 설치하는 일이 이미 완공되었으므로 인천에 새로 설치한 진을 화도진(花島鎭)이라 할 것이며 부평에 새로 설치한 진은 연희진(延喜鎭)이라고 부를 것이다" 고종은 두 지역의 포대와 군영의 공사가 끝났다는 무위소의 보고를 듣고 이같이 명했다.
화도진은 묘도(괭이부리)북변포대, 묘도남변포대, 북송곶(북성동)북변포대, 북송곶남변포대, 제물포북변포대, 제물포남변포대, 호구(논현동)포대, 소래포대 등을 관할했다.
결국 화도진은 인천을 빙 둘러싼 포대들을 예하부대로 둔 야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서 축조된 화도진은 인천이 개항되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개항이 확정되자 부평의 연희진은 폐쇄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에 이속됐다. 그후에도 금위영, 총융청 등으로 소속이 옮겨지다가 1894년 10월 말경에 폐쇄됐고 해방 전에 인근지역이 매립되면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82년 5월 22일 미국에 이어 6월 6일 영국, 그리고 6월 30일 독일 등과 수호조약을 체결했던 현장은 일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00여년전 화도진 부근의 모습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왔으며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진 정문 옆에 약 20여채의 민가가 있으며 간혹 말을 탄 병사가 총 혹은 창을 비켜들고 왕래했고 어쩌다 가마를 탄 양반들이 드나들곤 했다고 한다.
화도진은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념비가 건립된데 이어 지난 1988년 9월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화도진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동헌은 관아의 본 건물로 방 한켠에는 당시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의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왼편에 있는 내사(內舍)는 안주인의 거처로 방마다 반닫이, 반짇고리, 보료, 뒤주 등이 진열돼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마당 건너에 있는 행랑채는 화도진이 품고 있는 '과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화도진도」와 100분의 1로 축소된 화도진 복원모형 그리고 당시에 사용됐던 불랑기(佛浪機) 4, 5호 등 무기류가 전시돼 있다.
화도진 언덕에서 서북쪽을 향하면 지금은 한국유리 등 공장들로 시야가 가려지지만 어렴풋이 바다가 보인다. 우리나라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화도진은 오늘도 20세기말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이양선(異樣船)'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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