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스러진 성벽엔 옛 영화가 흐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자상(像)을 봉안한 교동향교가 있는 교동도는 한때 도호부와 수영(水營) 등 굵직굵직한 행정기관이 설치됐던 서해바다의 길목 섬이었다. 그때의 영화를 말해주는 읍성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
교동도는 강화군 섬 중에서 강화본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황해바다와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과 가깝고 중국을 오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조선시대에는 현(縣)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바다를 지키는 경기수영이 설치된 데 이어 경기, 충청, 황해 3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해군사령관직이라고 할 수 있는 삼도통어사(정2품)가 설치되기도 했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교동도의 북부 해안선은 이제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이 되었다.
교동읍성은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번지 일대에 있다. 이 읍성은 교동이 도호부로 승격되고 경기수영이 옮겨오면서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작은 성이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한 지역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해안 근처 고을에는 대개 읍성이 있었는데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의 등급과 주민의 수에 따라 그 크기가 달랐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 (1629)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는 305m이며 높이는 약 2.4m로 동, 남, 북 세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했다.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 이름을 붙였다.
영조 29년(1753)과 고종 21년(1884)에 문루와 성곽 등을 고쳐 쌓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졌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무너져 내렸는지 알 수 없고 남문은 1921년 때의 세찬 폭풍우로 문루가 없어졌다. 남문은 1975년에 해체 복원되면서 남문의 원형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나 문루에는 네 개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현재 남문에는 문루 없이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만이 달랑 남아있다. 문 안 바로 앞에 양옥집이 자리하고 있어 언뜻 보면 홍예문이 마치 이 집의 문처럼 보일 정도로 단출하다. 홍예문 왼편의 안쪽 벽에는 ‘南樓(남루)’ 바깥벽에는 ‘三道統門(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성곽은 민가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거나 잡초에 묻혀있어 아쉬움이 더하다.
■찾아가는 길 _ 강화대교를 건너 읍을 지나 송해면으로 향한다. 하점초등학교와 하점면사무소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창후리 방향으로 달리면 창후리선착장에 닿는다. 교동도 가는 배는 수시로 있다.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는 섬이지만 선착장에서 신고서를 간단하게 기재하면 별 어려움 없이 배를 탈 수 있다. 교동 월선포선착장에 내려 읍내리로 향하면 교동읍성이 나온다. 요금(편도)은 일반 750원이며 승용차는 12,000원(운전자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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