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고딕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의 대 변신
강화지역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인천 시내에는 두 개의 국가 사적이 있다. 경서동의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 211호)와 답동성당이다. 답동성당은 1897년에 지어진 고(古) 건축물이다.
고종 24년(1887) 5월 우리나라는 천주교 선교의 후견인 역할을 해 온 프랑스와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서울과 개항장에서의 선교사 거주가 허용되는 한편 대지를 구입해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는 서울에서 도보로 하룻길이면서 비교적 상업이 번창한 제물포항을 포교지로 정하고 처음으로 빌렘 신부를 파견했다.
당시 인천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 등 84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임시 모임 장소에서 어렵게 미사를 드렸다. 빌렘 신부는 곧바로 인천의 지세를 살피고 다니면서 성당 세울 자리를 물색했다. 성당부지 선정의 기준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중심지, 주변에 비해 잘 드러날 수 있는 높은 장소 등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빌렘신부 눈에 제일 먼저 띈 장소는 하인천의 옛 외국인 묘지가 있었던 언덕이었다. 외국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적 여건으로 보아 장래의 발전 가능성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지금의 답동 언덕으로 최종 결정했다. 3천212평 짜리 그 땅은 원래 시유지였는데 천주교 신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당시 인천감리(현재의 시장)인 민선훈이 기부하는 셈치고 단돈 엽전 25냥(2만5천원)에 넘겼다고 전해진다.
답동성당의 건립은 두 시기로 나뉜다. 먼저 옛 성당의 건축시기로, 1894년 5월 코스트 신부와 샤르즈뵈프 신부가 인천에 와 성당의 기초 공사 설계도를 그리고 바로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부지에는 많은 모래가 섞여 있어 흙을 많이 파내야 했다. 청일전쟁으로 건축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897년 7월 마침내 고딕양식의 단층벽돌 성당이 완공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하고 종탑 위에 작지만 뾰족탑이 세워진 성당의 아름다운 자태는 시내, 선창가 등 인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1933년 인천본당의 신자 수는 1,500명이었으나 성당의 수용능력은 400명 선이었다. 새로운 성당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듬해 4월 드뇌 신부는 성당의 개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어려운 공사였다. 착공 4년 2개월만에 1937년 6월 연건평 307평 위에 로마네스크식의 새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답동성당이다. 답동성당은 정면과 좌우에 반원 아치를 두고 중앙탑 꼭대기와 양측의 작은 철탑 위에 뾰족 돔을 얹어 아름다운 자태를 띠고 있다.
답동 성당이 신축된 지 3년 뒤인 1900년에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성당에 3개의 종을 설치, 매일 아름다운 종소리가 인천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 종은 일제 말기에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일제가 전쟁물자로 쓰기 위해 종을 강제로 공출했는데 성당 측은 건물 구조상 가운데에 달린 큰 종은 떼어낼 수 없다고 설득했고 나머지 두 개의 작은 종도 떼어서 해안동 쪽과 숭의동 쪽에 놓아두어 비상시에 경보용으로 사용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해 다행히 쇳물로 녹여지는 신세를 모면한다. 그 종들은 해방과 더불어 답동 성당에 다시 매달리게 됐다.
- 첨부파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