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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같은 청백리의 절제된 살림집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난 이건창(1852∼1898)은 신동이었다.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조선시대를 통 틀어 20세가 되기 전에 급제한 사람은 총 20명이다. 그 중 최연소 급제자가 바로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별시문과에서 뽑힌 이건창이다. 그 때 나이 불과 14세. 조정에서는 너무 일찍 급제했다 하여 4년 뒤인 만 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그는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저명한 문장가로서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내세운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 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내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 부시장 격인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 있을 때는 외국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내서 파면시켰다. 덕분에‘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유린할 때 비분강개하며 자결한 조부 이시원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이건창은 강직한 성품 탓에 앞날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반대파의 중상모략으로 멀리 압록강변과 고군산도 등에서 많은 날 동안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갑오경장 이후부터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다. 당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당의통략(黨議通略)>을 비롯해 <명미당집(明美堂集)> 등을 펴내기도 했다.
이건창 생가에는 청백리의 절제된 살림살이가 한눈에 묻어난다. 안채는 9칸 규모의 ㄱ자 형태로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3량 가구로 된 전형적인 경기지방의 한옥 구조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냈다. 각 방의 크기는 2평이 채 안되고 마루는 3평 정도가 된다. 초가 지붕으로 덮여 있어 옛날 옛적 박넝쿨이 지붕을 감싸고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온 가난한 선비집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대문 옆으로는 흙과 돌이 섞인 나지막한 담이 마당과 집을 감싸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 쪽에는 머슴이 살던 방이 있고 왼쪽에는 광이 있으며 안채의 방과 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다. 뒤뜰에 나지막한 동산이 있어 마루 뒷문을 열면 맞바람이 치고 운치 있는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넓은 마당 왼편으로는 그 집에 기거한 아낙의 일터이자 쉼터인 우물이 있다.
가팔랐던 이 나라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이건창은 광무 2년(1898)에 눈을 감았다. 그는 양도면 건평리 야산에 비석 하나 없이 쓸쓸히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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