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최고의 실력쌓아 인천팬에 보답하겠습니다
사실 인천은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에 농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7년. 하지만 인천에는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이 되어서야 겨우 소개되었다. 그래서인지 인천에는 농구팀이 별로 없다. 농구 꿈나무를 양성해낼 초등학교농구팀으로 남자팀 셋, 여자팀 둘이 있을 뿐이다.
중학교는 남자팀으로 안남중학교·송도중학교, 여자팀은 인성여중·부일여중 뿐이다. 이런 사정은 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남자 고등학교중 농구팀이 있는 학교는 송도고 뿐. 여고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인성여고, 명신여고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다.
왕년의 농구 슈퍼스타 배출지 인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천이 농구와 전혀 인연이 없는 고장은 아니다. SBS의 멋쟁이 감독 김동광, 슛쟁이로 통하는 왕년의 농구스타 이충희, 기아 토종농구의 선두주자 강동희 등 농구하면 내로라 하는 스타들이 농구의 명문 송도고등학교 출신이다.
여자농구도 그렇다. 국가대표 센터인 삼성의 왕눈이 정은순, 선경의 대들보 유영주는 인성여고가 배출한 보배들이다.
이제 인천 농구의 자존심을 대우제우스가 이어가고 있다. 대우제우스 농구단은 96년 3월에 창단됐다. 연세대 총감독을 지낸 최종규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여기에 어시스트 왕 출신의 유재학코치가 합류했다. 그리고 우지원, 김 훈, 석주일 등 연세대 신화를 창조했던 선수들을 영입했다. 명지대 돌풍의 주역인 조성훈, 정재헌도 가세했다. 젊고 패기에 넘치는 선수들로 꽉찬 팀을 구성한 것이다. 사실 96년은 그리 만족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96 코리안 리그에서는 8위, 전국체전에서는 3위를 했다. 96∼97 농구대잔치에서는 4승3패로 4위를 했다.
신생팀으로서 창단 1년 사이에 프로농구에 대한 사전 경험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97 휠라컵 프로농구'가 개막되면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프로농구시대가 온 것이다. 대우제우스도 여기에 대비했다.
우선 최종규감독은 경기비디오를 철저히 분석해서 외국선수 2명을 선발했다. 바로 터브스와 엘리어트. 그리고 선수들의 개인기를 높였다. 그래서 대우제우스는 패기와 젊음으로 똘똘뭉친 팀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드리서치에서는 중고등학생 600명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농구팀을 조사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의 35.5%가 가장 좋아하는 팀으로 대우제우스를 꼽아 인기도 1위를 차지했다. 대우제우스가 젊고 패기있는 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래서 패기의 대우제우스 농구단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우지원, 김 훈, 석주일 선수를 추종(?)하는 오빠부대도 거기에 가세했다.
그 덕분에 비교적 어린 나이의 대우제우스 선수들은 타향에서도 고향같은 느낌으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팬들이 대우제우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대우제우스가 명승부로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 비록 정규리그에서는 8승 13패로 6위에 그쳤지만 경기내용면에서는 어느팀보다 상위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우제우스는 어떤 팀과 경기를 하든 항상 팽팽한 경기를 펼쳐 승부를 점칠 수 없게 했다. 그 증거로 대우제우스는 7개 프로농구팀 모두에게서 1승씩을 거뒀고 반면 1패도 했다. 뚜렷이 약한 팀도, 특별히 강한 상대도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비록 패한 경기일지라도 결코 큰 점수차를 허용하지 않아 농구팬들을 긴장시켰다.
특히 정규리그에서 1위를 한 기아엔터프라이즈팀과 3게임을 치뤘는데 그중 1게임이 1골차 승이고 2게임이 1골차 패다. 이런 경기결과 덕분에 대우제우스는 '도깨비팀'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종규감독은 올해 13승 8패의 느낌을 갖고 있단다. 대우가 패한 13게임중 5경기가 1점 혹은 1골 승부였다.
그것도 작전의 부재나 실력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 첨부파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