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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인천은 한국근대건축의 종합전시장

2001-05-14 1999년 2월호

건축은 삶의 터전, 문화의 바탕이다. 개항초기에 세워진 인천의 근대건축물들은 대개 100여년 전에 머릿돌을 박았다.

전쟁 등에 의해 상당수 소실됐으나 무엇보다 일제하 역사에서 오는 반감 등으로 무관심 속에 세월의 이끼만 끼어간게 현실이다.

현재 시 기념물이나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일부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른 용도로 전용되거나 부분 개조돼서 활용되고 있다.

'건축문화의 해'를 맞아 우리 고장에 있는 근대건축물을 「인천근대건축의 시대적 변천에 관한 조사연구」(인하대 논문 1990 임헌봉),「인천근대건축의 보존에 관한 연구」(인하대 논문 1996 한광훈) 등을 토대로 재조명해 본다. 개항과 더불어 근대화가 시작된 인천은 서울의 관문으로서 점차 국제항으로 성장하며 근대건축물이 속속 세워졌다.

개항 초창기 양관(洋館)의 유입기라고 할 수 있는 1883년부터 1900년까지는 각국의 조계지가 설정되고 외국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곳곳에 그들만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인천 최초의 양관은 1883년 10월 31일 준공된 목조 2층의 일본영사관이다. 그후 청국을 비롯한 구미제국이 뒤를 이었고 그들의 거류지에 양관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청국영사관은 1898년에 청국지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던 현 화교중산학교 내에 세워졌다.  

중국풍의 '궁(弓)'형의 아치가 아케이드로 장식돼 있었는데 당시 중국인 주택에 거의 적용되었고 현존하는 선린동 지역내의 주택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 시기 종교건축물의 대표는 성바오르대성당(현 답동성당). 1894년 착공해서 1897년에 완공한 옛성당은 벽돌조 단층건물로 고딕적 양식을 띠었으나 1933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된 현 성당은 로마네스크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인천항을 통한 무역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외국인 상사건물과 호텔, 은행, 병원 등 건축물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최초의 상업건물인 독일계 세창양행은 1884년에 벽돌조 1층으로 중구 송학동에 세워졌고 영국계 홈링거 양행은 벽돌조 2층에 아치가 반복되는 영국식 르네상스형식으로 1895년에 건축됐다. 홈링거 양행 건물은 1953년 해군 수로국으로 전용되다가 지난 61년 화재로 소실됐다.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은 건축자재를 모두 일본에서 들여와 건축, 한때 인천의 명물로 자리잡기도 했지만 경인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급격히 쇠락하여 중국요리집 '중화루'로 사용되다가 지난 79년 건물노화로 철거됐다.
1892년에서 1893년까지 서양식 화폐를 제조한 중구 전동의 전환국은 단순한 벽돌공장 형태의 3동이 '凹'자 배치로 건축됐다. 화폐공장이 서울로 이전된 후 1908년 인천여고에 불하됐으나 잇단 화재로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측면에서 한국정부 최초의 양식건축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이밖에 이 시기에 지은 양관으로는 세창양행사택, 알렌별장, 헨켈저택 등이 있다.
인천 근대건축의 2기라고 할 수 있는 1901년부터 1910년까지는 경인선이 개통되는 등 신문물이 물ale 듯 들어왔다. 이 시기의 인천건축은 이전 시기와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부 종교건축과 외국인 개인주택에서 순수한 유럽풍의 건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식과 그리스식이 절충된 러시아영사관이 세워졌고 공립심상고등소학교(1903년)와 영화보통학교(1904년)가 건축됐다. 상업건축으로는 한국 최초의 담배공사라고 할 수 있는 동양연초상사가 1901년에 설립됐으나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닥터 알렌 별장
이 시기 건축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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