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진센' 너마저 만세를 부르다니…
2001-05-14 1999년 3월호
'진센'. 일본인들은 인천을 이렇게 부른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던 1919년경 인천은 일본 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인천 인구 3만6천여명 중 절반이 일본인이었다. '진센' 너마저도 만세를 부르다니….
인천의 만세운동은 그 어느 지역에서 벌어졌던 시위보다 일본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인천지역에서의 만세시위는 집회 8차례, 집회인수 약 9천여명, 투옥자수 15명에 달한다. 기록되지 않은 만세시위를 포함하면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인천의 만세불씨는 초등학교에서 지펴졌다.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합류, 거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3월 8일에는 시내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곳곳에 격문이 붙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후 5시 30분 경에는 기독교인 및 청년학생 등 300~400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같은 날 오후 8시 30분 경, 500여명의 시위군중이 어둠을 뚫고 경인가도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과 충돌하는 등 만세시위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부평지역의 만세운동은 횟수나 형세에 있어서 그 기세가 자못 최고조에 다다랐다. 3월 24일 오후 2시 계양면 장기리 장터에 6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중 일부 청년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은 총칼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5,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3월 27일 문학지역에서 시위가 있었고 28일에는 남동에서 만세소리가 이어졌다. 달이 바뀌어도 만세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4월1일에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화평동 일대에서 시가행진을 벌였고 월미도에서도 항일시위는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은 상점을 완전히 철시하고 만세시위에 동조했다. 당시 한 신문은 시가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해변의 파도소리만 인천시가지를 울렸다'. 80년 전 오늘, 초등학생에서부터 노동자, 농민,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천인들은 '진센'이기를 거부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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