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開化榮辱 유물 전시 中 '길거리 박물관'
인천 땅 밟기의 첫걸음은 신흥동 창고에서 시작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창고들이 어깨를 겹치듯 줄지어 있는 거리.
쇠락한 창고거리를 걷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월의 더께가 붙어 적당히 빛 바랜 건물들은 '시라소니'나 '상하이 박' 같은 주먹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기에 딱 좋은 세트이다. 일제가 쌀을 반출하기 위해 지천에 산처럼 쌀을 쌓아 놓았던 1930년대, 창고 앞에 있는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고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 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은 창고거리 바로 앞을 지금도 수인역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으로 운반하기 위해 일제가 깔아놓은 수인선(수원역-남인천역) 협궤열차의 기찻길이 창고 안까지 연결돼 있었다. 고려정미소 등 정미소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와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로 늘 번잡했던 신흥동 창고거리는 이제 붉은 벽돌에 말라 비틀어져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퇴락하고 있다.
겉모습을 그대로 두고도 쉽게 용도변경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 듯 쌀 창고 대신 들어앉은 캬바레와 디스코텍에 걸린 네온사인만이 오늘도 옛 영화를 꿈꾸며 깜박거리고 있다. 발걸음을 한 발짝 뒷길로 옮기면 인천여상이 나온다.
일제가 만국공원(서공원)에 견주어 그들만의 공원(동공원)을 만들고 그 안에 인천대신궁을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곳이다. 얼마전 까지 만해도 교정에는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신흥동 쪽으로 길을 건너 돌층계를 오르면 해광사란 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심에서 만나기 드문 사찰이라는 설레임을 다 느끼기도 전에 대웅전 뒤편으로 가면 이 민족이 겪은 슬픔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방문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원래 해광사는 1910년에 일본인이 지은 절이었는데 몇 년 전에 왜색풍의 절을 헐고 대웅전을 다시 지었다. 대웅전 뒷쪽과 옆쪽에는 조그만 벽돌집이 두 채가 있다.
원래 한 동으로 돼 있던 것을 분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예사로와 보이지 않는 뒤쪽 건물(시왕전)이다. 문을 열어 젖히니 영하의 바깥 날씨보다도 더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해광사 스님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아직도 그 건물 지하에는 한국전쟁 전몰장병들의 유해 40~50기가 모셔져 있다. 과거 일본인들의 삶의 터전답게 신흥동 일대에는 왜식풍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다. 가끔 그 골목에서 사진기를 든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신사를 만난다면 그는 일제강점기에 '진센(인천의 일본어 음)'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현재 남아있는 일본집의 백미(?)는 단연 시립도서관 구관 건물이다. 도서관 마당 끝에 있는 목조 이층집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의 옛 주인은 다름 아닌 '역무 정미소'로 이름을 날렸던 정미업자 리끼다께(力武平八). 정미소로 떼돈을 번 그는 전망 좋기로 소문난 이 곳에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건물 옆에는 일본식 정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분수연못과 석등이 있다.
그는 정원의 석등에 불을 켜놓고 일본 정미업자들과 함께 항구와 신흥동 정미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밤새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으리라. 씁쓸한 마음을 갖고 긴담모퉁이 길 쪽으로 내려왔다.
'긴담모퉁이 길'이란 지명을 아는 이가 있다면 필시 그는 인천 개화역사의 몇 페이지 쯤은 꿰뚫고 있는 사람일 게다. 애초에는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는데 1907년에 구릉을 헤치고 축대를 쌓아 '신작로'를 만들었다.
신흥동에서 경동을 거쳐 동인천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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