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상채기 난 땅 속에서 숨쉬는 호국영령의 기개
강화역사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벽에는 '帥(수)'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황토색 깃발이 걸려있다. 이 깃발은 모조품이다. 진짜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여기서부터 강화도의 슬픈 역사는 시작된다.
강화역사관에는 다른 지역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국난극복실'이란 테마관이 있다. 강화도가 지정학적으로 외세침략의 단골장소이기 때문에 개설될 수 밖에 없는 방이다.
고려 때의 항몽 관련 유적부터 조선말기의 운양호사건, 신미양요 등 생채기 난 우리역사와 관련된 사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을 나와 바다 쪽으로 몇 발짝 내디디면 갑곶돈대가 나온다. 김포 땅이 바로 앞에 보이는 갑곶은 옛 강화의 출입문이자 요새였다.
그곳은 고종 3년(1866), 당시 불랑기국(佛狼機國)이라고 불리던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며 닻을 내린 곳이다. 19세기 말 외세 침략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곳이다. 갑곶돈대에서 광성보로 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최근에 개통한 해안순환도로 덕분에 읍내를 통하지 않고 역사관에서 곧바로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 강화도 격전지에 한걸음에 다다를 수 있다. 해안도로를 달리면 철조망도 함께 달린다. 이제 저 견고한 철책은 누굴 막기 위해 세워졌는가.
# 대포와 창의 '게임'
광성보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로 꽉 차있다. 언제부턴가 광성보는 학생들의 인기 소풍장소가 되었다. 광성보는 광성돈대와 손돌목돈대 그리고 용두돈대를 아우른다. 성문인 안해루와 성벽은 지난 77년에 복원된 것이라 유적으로서의 맛은 좀 밋밋한 편이다. 광성보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주변의 지형과 지세를 감상 포인트로 잡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1871년 음력 4월 신미양요. 이번엔 미국이 싸움상대다. 1866년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 때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좌초된다.
그로부터 5년 후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아세아함대 5척이 1,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해협으로 들어왔다. 4월 23일 미군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다음날 광성보를 공략했다. 광성보의 싸움은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대포와 총을 든 다수의 청의병사(靑衣兵士)와 창과 칼을 든 소수의 백의병사(白衣兵士)의 싸움. 광성보 전투는 조선군이 참패했다. 그때 그 '帥'자 깃발을 뺏긴 것이다. 미군 측이 기록한 종군기록을 보자. '조선군은 약세이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않고 용감히 저항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기를 잃은 자는 돌과 흙을 들고 대항해 왔다. 살아 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언덕을 넘어가 일부는 강물에 투신 자살을, 일부는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투신한 조선 병사들의 하얀 시체가 크림 빛깔의 한강에 부침하며 떠내려가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안해루에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광성보 전투를 이끌다 전사한 어재연·어재순 두 형제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각이 나온다. 그 옆에는 그때 함께 전사한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길 아래쪽에는 기와담장으로 둘러 처진 7개의 분묘가 자리잡고 있다. 51명의 이름없는 용사들의 주검을 화장시켜 합장시킨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다. 죽어서도 광성보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니 잠시 옷깃이 여며진다.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에 흐르는 강 아닌 강, 염하(鹽河). 그곳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원형극장처럼 생긴 손돌목돈대가 있다.
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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