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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

2001-05-16 2000년 6월호

# 지워지지 않는 전쟁의 상흔
광성보와 초지진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 요새를 연결시켜 주던 덕진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력한 포대를 가지고 있었던 덕진진은 김포 쪽에서 튀어나온 덕포진 포대와 마주 보며 해협의 길목을 지키는 강화 제 1의 요충지다.

신미양요 당시에는 60여 문의 대포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제 1의 포병부대가 주둔하던 요새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 바다를 향한 대원군의 경고비는 소리없는 메아리였다. 극동함대 소속의 미국 병사들이 '함부로' 육지로 올라오자 덕포진의 포대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포탄이 다 떨어진 조선군 포병들은 자신의 몸을 포신에 묶어 놓고 싸울 만큼 임전무퇴의 강인한 정신을 지녔다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백병전의 대가로 염하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덕진문루인 공해루(控海樓)를 돌아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15개 포문이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남장포대가 나온다. 그곳에는 그때 조선군의 몸을 묶었을지 모를 그 포대가 주인을 잃은 채 방문객을 맞고 있다. 덕진진을 나와 더 아래로 내려가면 초지진. 광성보나 덕진진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품고 있는 사연은 결코 적지 않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아세아 함대의 첫 상륙지였으며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에 접근했을 때 이곳 수비군의 화포에서 불이 품어졌다. 운양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초지진을 향해 110밀리와 40밀리 함포로 일제히 사격해 왔다.

일본의 조선침략의 신호탄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조선군은 사정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구식화포에 의지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돈대 중앙에는 그때 쏘았음직한 대포 1문이 전시돼 있다. 어떻게 이런 포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있었을까.

돈대 내의 노송 가운데와 석축 한편에는 당시의 포탄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아직도 그때의 상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 전세 뒤집은 정족산 전투
해안을 벗어나 전등사 길로 접어든다. 강화가족호텔을 바로 지나면 천년고찰로 오르는 언덕길이 나온다. 언덕마루에 다다르면 돌과 벽돌로 소박한 홍예를 만들어 멋을 부린 동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돌문 밑을 지나면 왼쪽에 비각이 하나 서있다.

'양헌수장군승전비'이다. 여기가 바로 병인양요 때 수세에 몰리던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은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 현장이다. , 정족산성은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산성으로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성으로 총 길이가 약 1㎞에 달한다. 1866년 갑곶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유린하고 이곳으로 향했다.

이에 양헌수 장군은 비밀리 500명의 포수를 이끌고 덕진진을 건너서 미리 정족산성에 들어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성을 향하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선 사냥꾼들의 화승총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공격에 프랑스군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프랑스군은 강화도로 들어왔던 갑곶으로 다시 쫓겨나갔다.

결국 프랑스군은 조선 땅에서 물러났다. 전등사 대웅전에는 조선군의 기개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법당의 기둥에는 먹으로 쓴 글자들이 낙서처럼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정족산성 전투의 결사항전을 앞둔 포수들은 예불을 드리고 법당의 기둥과 벽에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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