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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정치, 경제, 문화의 영원한 '광장'

2001-05-15 2000년 3월호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의 신포동에 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높아진 건물 외에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신포동은 늘 그 시대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한복판이 되어왔다. 그런 자취는 신포동 구석구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신포시장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개항(1883년) 뒤. 애초 중국인과 일본인이 터를 먼저 잡아 지금의 성광(조선)떡집 쪽에서 중국인들이 신발과 당근, 양파, 부추 등 채소를 팔았고 맞은편은 일본인들 차지였다.

이때 나뉘어진 구역이 지금껏 이어져 한 시장 골목안에서도 한쪽은 내동, 맞은편은 신포동이다. 그때 이미 신포동은 장터를 중심으로 상점과 유흥업소가 즐비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지구촌 가족'이 모인 국제동네였다. 당대를 주름잡던 예술인들은 신포동 주점골목에 모여 시대를 노래했다. 지금은 신포주점 한 곳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예전엔 대동강이니 마냥집, 다복집, 백항아리 등 왕대포집이 즐비했다.

이상, 한상억, 박팔양, 김기림, 오장환, 한하운, 박인환, 조병화…이 골목에 체취를 남기고 간 이들은 '인천'을 주제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맹인의 아버지 박두성, 김은호 화백, 김활란, 고유섭, 최초의 함장 신순성…신포동에 추억 한편씩 두고간 이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슴 벅찬 일이다. 주점골목에서 가난한 예술인들의 낭만이 꽃피었다면 지금의 카페거리 주변에 자리잡았던 고급 요리집들은 '상류사회'의 문화가 있었다.

'현대사회' 양쪽으로 화선장과 행화촌 등 한국인들이 평생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을 소원으로 품었던 고급요리집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 지금 메밀국수로 유명한 청실홍실 자리에 있었던 '금파(金琶)'는 서양식 스탠드바였다. king bar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1930년대 한국소설사의 새로운 경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노동소설인 강경애의 '인간문제'에 등장한다. 지금 건물은 1910년대 지어진 그 모양 그대로 90년대 다시 지어진 것이다.

영화인들은 이곳에 모여 지금 '서울의 충무로'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해방 뒤 신포동 일대에 자리잡은 영화관이 현재 외환은행 자리에 있던 키네마 극장과 맞은편의 동방극장을 포함해서 무려 다섯 곳이었으니 영화를 보려면 이곳으로 와야 했다. 실제 자유공원을 비롯한 인천 앞바다의 풍경을 배경으로 해서 많은 영화가 촬영되기도 했다.

 신포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타워' 아파트는 김구선생이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인천 감리서가 있던 자리다. 김창수에서 김구로 개명한 곳도 바로 이곳. 그때 신포동과 싸리재 너머 율목동 지역의 한국 상인들은 인천객주회를 결성해서 의기투합해 김구선생을 구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발휘했다. 사람가는데, 돈이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

신포동에 점포하나만 가져도 인천 알부자란 소리를 들었고 한때 이 일대 땅 한 평 값이 서울의 명동 다음으로 전국에서 가장 비싼 금싸라기였던 호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형편은 그 말 앞에 '왕년에'란 수식어가 붙는다. 신포동 상권의 '보디가드'역할을 했던 관공서가 뿔뿔히 흩어지자 80년대 후반부터 기능이 많이 축소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IMF까지 터지는 바람에 시장 분위기가 잔뜩 위축되어 있다.

하지만 '유행'이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신포동은 오늘의 유행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고, 사람들은 내일도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100년 전부터 그래왔듯, 100년 후에도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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