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이란 말이 앞에 따라 붙어야 제 맛이 나는 산, 금강산. 지금이야 남쪽의 관광객들이 이웃집 드나들 듯 그 산으로 들지만 아직도 금강산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북으론 백두, 남으론 한라를 두고 한반도의 등골로 오롯이 선 금강은 사계절에 따라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시인의 가슴 한켠에 늘 자리잡고 있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시로서 읊을 수 없는 시경이 금강산이요 붓으로 그릴 수 없는 산수가 금강산'이라 했다. 이렇듯 금강산은 사유(思惟)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신령한 산이었다. 게다가 동족상잔의 아픔과 분단의 슬픔을 겪으면서 더욱 더 사바세계의 정토(淨土)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분단의 상징으로 남아있던 금강산은 오선지에 그려짐으로써 우리 국민에게 다시 다가왔다. 인천에 탯줄을 묻고 이곳에서 자란 두 예술가 한상억 시인과 최영섭 작곡가에 의해 한편의 가곡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함께 자란 시인과 작곡가
1961년 KBS로부터 작곡의뢰를 받은 청년 작곡가 최영섭은 평소에 애송하던 한상억의 시 '그리운 금강산'에 율을 붙여 그해 8월에 노래를 완성했다.
1929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동구 화평동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을 본적으로 삼는다.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중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해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다.
6.25 사변 후 인천으로 돌아 온 최영섭은 인천여중고, 인천여상, 인하공대 교양학부 등에 적을 두고 고향 땅에서 음악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내리교회 성가대 지휘자, 시립합창단 지휘자, 인천음악감상회 해설자 등으로 맹활약한다. '그리운 금강산'은 인천여중·고에서 교편을 잡고 남구 숭의동 전세집에 살고 있을 때 작곡한 것이다.
1915년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에서 태어난 시인 한상억은 전등사 밑 길상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상업학교로 진학하면서 뭍으로 오른다. 인천금융조합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썼고 45년에는 동인회 <시와 산문>을 조직하여 시작(詩作)활동에 더욱더 몰두했다. 그 당시 그는 '월미도에 갔더니' '인천찬가' 등 향토사랑을 절규하듯 시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운 금강산'은 그의 향토애가 '강토애(疆土愛)'로 승화된 시이다.
피난민 땅에서 태어난 '그리운 금강산'
어찌보면 '그리운 금강산'이 인천에서 태어난 것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6. 25동란 때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이 인천이다.
실향민들은 두고 온 산하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들의 애환이 곳곳에 서려 있는 땅에서 태어난 시인과 작곡가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아픔과 같이 했을 것이다. 인천시와 새얼문화재단은 통일을 염원하고 인천을 빛낸 두 예술가를 기리어 우리고장의 긍지로 삼기 위해 광복 55주년을 맞아 지난 8월 15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세웠다.
6.5m 높이의 기념비에는 그리운 금강산 가사 및 악보와 '통일을 염원하며(글 조우성)'라는 건립문 등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단순한 노래비가 아니라 남북의 대단합과 화해 그리고 통일의 이정표로 우뚝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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