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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香은 바람에 날리고…
우리가 마시고 있는 한 잔의 차(茶)에 2천년 가까운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2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차를 즐기며 차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설(說)은 여러가지이다. 가장 빠른 것은 일연 스님(1206~ 1286)의《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 김양감의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인도)의 공주 허황옥이 서기 48년 음력 5월 배를 타고 고국을 떠나서 그해 7월 27일 김해의 별진포에 상륙하였다. 허공주의 수행원은 20명이었고 혼수품으로 금·은·패물·비단과 함께 차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능화(1869~1943)의《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이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무려 780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면 우리 인천은 차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인천에는 차와 유서 깊은 장소가 여럿 있다. 차의 달인 백운 이규보 선생의 유적지, 허암 차샘, 차맷돌이 발견된 선원사, 정수사와 함허스님 등이다.
찻물 길어내던 허암 차샘(虛庵茶泉)
서구 검암동 허암봉 기슭에는 조선 연산군때 문신인 허암 정희량 선생이 살던 집터인 허암지가 있다.
허암선생은 1469년 한양에서 태어나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20대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성종이 승하하자 불사(佛事)를 한다고 글을 지어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또 대교(待敎)로 있을 때 연산군을 가르쳤는데 왕의 비행을 자주 지적해 미움을 사다가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귀향을 갔다. 선생이 허암산 기슭에 은거하게 된 것은 연산군 8년, 귀양에서 풀려나면서였다. 선생은 주역에도 조예가 깊어 장차 갑자사화(연산군 10년)가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어머니묘에서 시묘(侍墓)한 뒤 한강가에 신발을 벗어놓고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고 강을 뒤졌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때 선생이 한강을 건너 허암산으로 숨어 들어왔다고 한다. 정희량 선생은 차와 술을 아주 좋아했다. '밤에 앉아서 차 달이기와 홀로 앉아서 차를 달여 매계에서 받들어 올린다'는 글이 남아있다. 또 술은 탁주 세 그릇을 마시고 청주 두 그릇, 소주 한 그릇을 마셨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내가 타고난 천진(天眞)을 온건히 한다. 술을 스승으로 삼으니 성인도 현인도내 스승이 아니다. 자기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니 늙음이 닥쳐와도 알지 못한다. 누가 술의 즐거움을 알리요'라는 말을 할 정도로 술을 아주 좋아했다. 현재 허암산 기슭에는 정희량선생의 집터인 허암지와 선생이 찻물로 사용했을 샘이 있고 허암차샘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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