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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자본과 민족자본과의 한판 승부 각축장
인천에 처음으로 개설된 근대식 은행은 일본의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출장소였다.
개항 이후 일본은 자국 상인들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1878년에 부산에 지점을 설치한 후 인천해관(세관의 옛 이름) 개설에 따른 해관세 취급과 한국산 금을 매수하기 위해 1883년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를 개설한다.
인천에 일본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며 거래금액이 늘어나자 제일은행은 1888년 9월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하고 그해 10월에는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를 개설할 만큼 규모가 커진다.
"조선에서 가장 멋지고 견고한 석조 건물 사옥을 가지고 막대한 거래를 하고 있는 제일은행이 제물포에 있다."라고
영문잡지 『코리아리뷰』(1901년 1월호)에 게재될 만큼 거래 업무는 활발했다.
제일은행은 한국화폐정리, 국고업무, 은행권 발행 등 1909년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한동안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면서 경제 수탈의 전위부대 역할을 했다.
특히 1902년에는 10원(圓)·5원·1원 등 3종류의 은행권을 발행하여 국내 통화흐름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제일은행에 이어 제18은행(1890년 10월), 제58은행(1902년 7월) 등 일본계 은행과 보험사들이 잇따라 진출하면서 1900년대 초에 이미 인천에 문을 연 일본계 금융업체는 20여 개에 이른다.
제일은행에 이어 제18은행(1890년 10월), 제58은행(1902년 7월) 등 일본계 은행과 보험사들이 잇따라 진출하면서 1900년대 초에 이미 인천에 문을 연 일본계 금융업체는 20여 개에 이른다
일본금융자본의 진출에 선두자리를 빼앗긴 서구계 금융기관들도 서둘러 사무실을 내기 시작한다. 홍콩에 설립된 영국계 은행으로, 청나라의 관료자본과 영국의 상업자본이 결합하여 세운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189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인천에 대리점을 개설한다.
또한 당시 남하정책에 혈안이 되어있던 제정 러시아는 친로파를 부추켜 50만 루불의 자금으로 1898년에 노한(露韓)은행을 설립하고 그 이듬해 인천에 지점을 개설한다. 그러나 노한은행은 석달을 채 못 넘기고 문을 닫는다. 이밖에 인천에 진출해 있던 타운센드상회, 광창양행, 세창양행 등 외국계상사는 금융기관의 대리점이나 대행사 역할을 하면서 인천은 세계 금융계의 각축장이 된다.
외국계 은행의 진출에 자극을 받은 한국인들은 은행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2월 에 한성은행을 개설하며 1899년 1월에는 대한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을 설립한다. 대한천일은행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으로서는 처음으로 1899년 5월에 인천에 지점을 세운다.
인천지점 지배인으로 선임된 서상집은 우리나라 금융기관 최초의 지배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본점으로부터 영업점 포상장과 포상금을 받는다.
"인천지점이 개점한 이래 설치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업세가 날로 신장하였다. 특히 어려운 외국인에 대한 교제와 복잡한 유통화폐구조 속에서도 지배인 서상집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취임 이래로 전국에 그 명성이 자자하고 우리 은행 신용을 확립시킴에 외국은행과 비교해도 하등 손색이 없으니 어찌 우리 은행의 행운에만 그칠 것인가.
그 노고를 표창하여 인천지점의 이익금 중 정규 이외에 5/100를 귀하의 상여금으로 특별히 지급키로 결정하는 바이니 점차 업무에 충실하여 효과가 더욱 나타나도록 바란다." (상업은행 100년사) 대한천일은행 인천지점은 외국계 은행 틈 사이에서 민족자본을 끌어들이며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한다.
1903년 2월 17일에는 대한천일은행 광교본점과 인천지점을 연결하는 전화가 개통돼 종전보다 월등히 빠르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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