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낭만속에 숨겨진 수탈의 역사
수인선은 사설철도(私鐵)였다. 경동철도주식회사가 1935년 7월 인천-수원간 협궤선 부설허가권을 얻어 공사에 착수한 지 2 년만인 1937년 8월 6일에 수인선을 개통했다.
시발역에서 종착역이 빤히 보일 듯 한 거리인데 운행 구간의 길이는 52㎞이다. 수인선은 선로 간격이 일반철도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762㎜인 협궤열차이다.
객차 1량의 크기는 버스에도 못 미치며 폭은 어른들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이다. 외향만큼이나 힘도 허약했다.
아침이슬이 심하게 내린 날은 선로가 미끄러워 오르막을 오르지 못해 모래를 뿌리고 승객들이 밀어야했던 일, 버스와 충돌했는데 버스는 멀쩡하고 열차만 나자빠졌던 이야기 등 살아있는 전설(?)이 아직도 많이 전해 온다.
협궤철도는 공사기간이 짧아 비교적 설치가 간단하고 유지·보수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지선(支線) 철도로는 그만이었다. 운임 수입을 늘려보자는 생각에서 굴곡이 심한 해안선 그대로 철로를 놓았다는 뒷 얘기도 있다.
이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었고 커브를 틀 때마다 몹시 뒤뚱거렸다. 아무튼 해안선을 끼고 돈 덕분에 승객들은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수인선의 역은 수원역부터 고색-어천-야목-사리-일리-고잔-원곡-군자-소래-남동-송도를 거쳐 남인천-하인천역에 이르렀다.
수인선은 이미 1930년 12월 1일에 개통된 수원-이천 구간(53.1㎞)과 이듬해 같은 날에 개통된 이천-여주 구간(20.3㎞)을 잇는 수여선과 이어지면서 인천에서 여주를 한번에 오가게 되었다.
수인선은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경기 호황을 누리던 인천의 일본 상공인들은 자신들의 상권을 경기 내륙 깊숙이 확대시키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일제는 열차를 이용해 여주·이천 일대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최고품질의 쌀을 신흥동 정미소 창고에 꽉 채웠다. 정미된 쌀은 일본으로 고스란히 반출되었다.
소래와 남동쪽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해산물도 수인선에 실어 인천항에 다달았다. 반면에 인천공업지역에서 생산되고 항구에 집산 된 각종 생필품들이 열차를 타고 경기 내륙지방까지 가게되었다. 당시 인천-수원, 수원-여주간의 하루 열차운행 횟수는 왕복 5차례였다.
해방 후 사설 철도에 대한 국유화 조치로 수인선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산업구조의 변화와 다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그 기능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결국 1973년 11월 그때까지 종착역이었던 남인천역이 문을 닫고 송도역이 종착역이 되었다. 이후 화물과 승객이 감소함에 따라 1992년 송도-소래간이 폐쇄돼 인천에서 수인선의 운행은 종말을 고했다.
안산전철 개통으로 소래-한양대 앞 운행구간 마저 줄어들더니 급기야 1995년 12월 31일자 운행을 끝으로 60여 년의 삶을 마무리한다.
최근 협궤열차가 다니던 인천-수원간을 복선 전철화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지상화냐 지하화냐를 놓고 마찰이 일고 있어 수인선은 또다시 세상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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