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기차통학생들 야학경영 등 민족계몽 앞장
인천-서울간 기차가 개통되자 새로운 풍속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1915년경부터 인천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열차를 이용해 서울로 통학했다. 당시 인천에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박문학교, 영화학교, 축현심상소학교(현 축현초교) 등 초등학교에서 매년 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들이 진학할 수 있는 상급학교인 중등학교로는 인천남상업학교, 인천북상업학교 그리고 인천고등여학교 등에 불과해 인문계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진학해야만 했다.
신태범 박사의《인천한세기》에 의하면 1920년대에 들어서자 통학생 수는 한국학생이 200여명, 일본학생이 100여명 가량에 이른다. 거의 모든 학생들은 축현역(현 동인천역)에서 승차했다. 하루에 18번씩 오고가던 기차는 서울까지 55분 정도 걸렸다. 아침 6시에 첫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서울을 향했고 밤 10시면 마지막 기차가 인천으로 학생들을 실어 날랐다. 당시 기차 삯은 어른이 55전이었는데 학생통학패스는 한달정기권이 2원, 6개월권이 6원이었다. 학생에게 엄청난 특혜를 베풀어 준 것이다.
기차통학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낭만이었다. 객차는 의자도 넓고 등받이가 높아서 학생들은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차창 밖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을 키우기도 했다. 때론 삼삼오오 모여 문학과 철학을 논하는 사랑방 구실도 했다. 앞 칸은 남학생, 맨 뒷 칸은 여학생이 탄다는 불문율이 생겼지만 학생들의 로맨스는 화차의 석탄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결혼한 커플이 종종 생겨나기도 했다. 거의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운행됐기 때문에 기차통학생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첫 번째 칸은 제일고보, 두 번째 칸은 양정고보 식으로 학교별로 고정 칸이 생겼지만 통학생 전체가 결속력이 워낙 강해 결국 전체 기차통학생 친목회가 발족된다.
친목회는 월례강좌 등을 개최하며 인천문화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후에는 야학경영, 교육사업 등을 통해 민족계몽에도 앞장섰다.
후에 배재학교 통학생과 졸업생은 별도로 인배회(仁培會)를 결성, 사회운동을 펼치기도 했는데 회장직을 맡았던 이길용은 후에 동아일보기자가 되어 손기정선수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살사건의 장본인이 된다. 통학생친목회는 1920년 6월에 한용단(漢勇團)을 조직하며 그 세력을 키운다.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씨가 한용단야구팀 발족의 산파역을 맡았다. 한용단은 스포츠활동과 함께 문예지 발간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항일학생운동의 근간이 됐다.
한용단야구팀은 시민의 '희망'이었다.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에서 한용단의 야구경기가 벌어지면 시민들은 일손을 놓고 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지게를 세워놓고 구경하다가 조갯살과 생선을 썩혀버리는 장사꾼들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들은 일인에 대한 울분과 원한을 한용단의 야구를 통해 발산시켰다. 특히 일본인으로 구성된 미두취인소 <미신(米信)> 팀과의 라이벌 경기가 벌어지는 날은 인천 전체가 들썩거렸다.
1924년 미신과의 결승경기 중 편파판정에 대한 한용단 응원단의 항의가 급기야 충돌사고로 이어져 일제는 한용단을 해체시킨다. 그후 1926년 한용단을 재건하려했으나 일제는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해 어쩔수 없이 '고려야구단'이란 이름으로 재창단된다.
기차통학생친목회가 모태가 된 한용단은 고려야구단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인천스포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물론 청년학생운동의 불씨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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