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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그들 마음대로 인천지도에 금을 긋다.

2001-05-16 1999년 6월호

인천이 한국의 근대사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1883년(고종 20년) 개항 이후이다. 문이 열리지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인들이 인천으로 물밑 듯 들어왔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거주할 땅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조계(租界)제도의 설정이다.

조계는 일종의 자치지구로서 행정적으로 우리나라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사법적으로도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당시 인천의 노른자위 땅은 일본조계 청국조계 각국조계 등 세 조계로 분할됐다.

조계 중에 일본조계가 제일 먼저 생겼다. 1883년 9월 30일 우리측 독변교섭통상사무(督辨交涉通商事務) 민영목과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사이에 인천구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를 체결했다. 일본인들은 서둘러 인천지도에 빨간 줄을 그었다. 응봉산(현 자유공원)의 남쪽 지역인 지금의 관동과 중앙동 일대 등 양지 바른 언덕과 평탄한 지역 8천여평을 차지했다. 택지의 경매가는 2㎡ 당 조선동전(銅錢) 250문(文)이었다.

국운이 기울대로 기운 우리나라 정부는 조계가 설정되기 전인 그해 3월 하순에 인천부사로 하여금 조계 경계선에 있는 120여기의 무덤을 이장토록 하고 민가 6,7채와 논밭을 일본 상인에게 팔도록 했다. 이미 인천항에는 일본인 두 세명이 군함을 타고 들어와 군함의 식료품 구입, 주류 소매, 사진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일년이 채 안돼 밀려드는 일본상인들 때문에 일본조계는 과포화 상태에 빠진다. 경매를 통해 인근지역(현 관동 1가) 3천800평을 더 확보하지만 이것도 곧 부족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한 뼘의 땅도 확보할 수가 없었다. 서쪽에 청국조계가 설정되고 동쪽과 내륙쪽으로는 각국조계가 설정되면서 그들의 '땅 넓히기'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들은 조금 떨어진 지역에 또 다른 조계지를 만들든지 아니면 현 조계지 앞의 바다를 매립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본인들은 바다를 메꾸기로 하고 해면매립계획을 세우지만 구미 각국 사신들의 반대와 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898년 10월에 매립공사를 착수한다. 이듬해 5월에 지금의 해안동 일대 약 4천여평의 새로운 땅을 확보한다.

매립을 했음에도 청일전쟁 후 일본인의 수가 4천명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결국 일본인들은 주변의 한국인 동네, 즉 신포동 선화동 답동 전동 용동 만석동 등으로 흘러 들어간다. 송학동 마루턱에 있는 홍예문은 바로 일본인들이 지계확장을 위해 1908년에 뚫은 역사증거물이다.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자 서둘러 그들의 조계를 설정한다. 청국조계는 1884년(고종21년) 4월에 조인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의한 것인데 그 지역은 지금의 선린동 일대(차이나타운) 구릉지대 약 5천여평이었다. <인천부사(府史)>에 의하면 이미 그때 중국인 5명이 옛 세관 뒤편에 집을 짓고 식료품 잡화류의 수입과 해산물류의 본국 수출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었다. 청국조계도 2년이 지나자 다시 확장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지금의 싸리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내동에서 경동으로 이어지는 싸리재 부근에는 한국인 가옥 300여채가 있었는데 이주비를 후하게 받고 용동으로 옮겼다.

그후 당시 경인가도였던 싸리재 양쪽 변으로 청국상인들이 운영하는 소매잡화상들이 들어섰고 인근에 그들이 경작하는 채소밭이 즐비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한국인과 청인들의 다툼이 심해 1888년 청국 총리 원세개가 한국병사 4명을 파견할 것과 수시로 순찰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거리에는 해방 후 80년대 초까지 만해도 평화각이나 영풍루 등 청국조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청일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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