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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시키신 분~'… 서울까지 자전거로 배달
음식은 사람이 꼬이는 곳에서 전파되고 발전한다. 개항이 되자마자 '인천드림'을 꿈꾸는 자들로 인천은 들끓었다. 항구의 화물작업이나 도로를 닦는 일 등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군꾼들(막일꾼)이 몰려들었다. 충청도 사투리와 경상도 말을 하는 골목이 생겼고 전라도 말과 이북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동네가 생겼다. 이때 전파되고 발전한 음식이 바로 냉면이다.
냉면의 원료인 메밀은 잎이 파랗고 꽃이 희며 줄기가 붉고 열매가 검으며 뿌리가 노랗다고 해서 청 백 홍 흑 황 등 오색을 갖춘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하여 옛사람들은 음식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식품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황제도 냉면을 무척 좋아했는데 특히 동치미 국물로 말은 냉면을 즐겨들었다고 한다. 임금님은 왕위를 넘겨주고 덕수궁에 기거할 때 궁궐 밖 여염에서 냉면을 사 갖고 오게 해서 곧잘 밤참으로 드시거나 함녕전 대청에 나인들을 불러다가 윷놀이를 시키고 새참으로 냉면을 같이 먹었다고 전한다. 인천은 일제강점기에 쌀 거래장인 미두취인소가 설립되면서 사람과 돈이 넘쳐났다. 시내 곳곳에 음식점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근대식 외식업소의 등장은 인천이 서울보다 앞섰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에 대중음식점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박람회(1925년)가 개최된 이후였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는다.
서울에 설렁탕과 장국밥을 파는 집은 흔했지만 아직 냉면 국물을 맛보기 힘들었던 시절에도 인천 곳곳에는 창호지를 오려만든 냉면집 깃발들이 나부꼈다.
이북에서 '남하'한 냉면은 인천에서 활짝 꽃 피웠다. 인천냉면은 지금의 용동 마루턱에 자리잡고 있던 평양관(平壤館)이 원조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 답동 성당 옆의 사정옥(寺町屋)과 배다리 너머에 있던 금곡루(金谷樓) 등이 한때 이름을 날린 냉면집들이다. 특히 당시 극장이었던 표관(瓢館) 옆에 자리한 사정옥은 활동사진을 보고 나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여간해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의 냉면집은 직접 먹으러 오는 손님도 많았지만 주문이 더 많았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과 신태범 박사의 <인천한세기>를 보면 미두취인소 직원들이 점심에 냉면을 한꺼번에 스무 그릇 이상 시키곤 했다. 그러면 배달꾼은 냉면그릇을 얹은 긴 목판을 어깨에 멘 채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마치 서커스를 하듯 달리는 배달꾼들이 나타나면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진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오늘날의 '철가방'이 봐도 경탄할 만한 곡예배달이었다.
한때는 서울 한량들이 경인선 열차를 타고 인천으로 '냉면여행'을 오기도 했고 심지어 명동이나 종로까지 자전거로 냉면을 배달했다는 믿기지 않는 '전설'도 전해온다. 더러 경인열차 차장 너머로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줄지어 가는 냉면배달 자전거 행렬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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