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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영국 범선 3척이 곧 입항할 것임을 아뢰오"

2001-05-15 1999년 5월호

백범 김구 선생은 전화 때문에 죽음을 모면했다. 인천 감영에 수감 중이던 김구 선생은 사형집행 당일에 전화선을 타고 온 '사형집행 중지'라는 어명 덕분에 살아났다. 그때 만약 인천-서울간 전화가 개통돼 있지 않았다면 백범은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 인천은 우리나라 전화사(史)의 시발지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도입된 전화기는 궁중과 각 아문(지금의 정부부처)과 인천에 설치됐다.

 

공식적인 최초의 통화기록은 1898년 1월 28일 오후 3시, 인천감리가 전화로 외아문에 영국범선 3척이 입항 할 것이라고 보고한 사실이다.(서울문화대관 교통 통신편에 서술) 같은 날 오후 5시에 궁중에서 외무판을 대령하도록 전화로 외아문에 시달했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으로 1882년 3월 말 경이었다. 청나라에서 기술을 습득한 상운(尙蕓)이 귀국하면서 전화기를 가져왔는데 궁중에서 고종 이하 중신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시험통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화기는 그해 7월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파괴됐다. 1897년에 전화소가 설치돼 궁내부 전화 개통 이전에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전후해서 실제로 사용된 비공식적인 기록도 있다. 전화소는 궁내부 소속으로 황제의 직속기관이었고 전화과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직책도 있었다.

이때 전화기는 텔레폰(Telephone)의 음을 한역한 다리풍 덕진풍 덕률풍 전어통 어화통 전어기 등으로 불렸다. 고종황제가 기거하는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황제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이 대청마루 전화를 들어 정부 각 부처에 어명을 내렸다. 이 전화기가 한번 들어올려질 때마다 국가대사가 결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전화를 대청전화(大廳電話)라고 했다.

일반인들의 전화사용은 1902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일본은 인천에 있는 그들의 우편국으로 하여금 인천-서울간의 전화가설을 서둘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우리정부는 일본측의 전화가설을 막기 위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화가설을 급히 추진했다.

마침내 1902년 3월 18일 통신원령 제 1호로 전화개통을 공고했고 이틀 후 3월 20일에 경인간의 민간전화가 개통된다. 이것이 공중전화의 효시이다. 민간전화가 개통된지 1년 동안 개인전화를 가지고 있었던 집은 한성(서울)에 11개소, 인천에 7개소, 평양에 2개소 뿐 이었다.

통신원 산하 전화소 직원들은 전화업무보다 외국인 상사를 비롯해 큰 회사나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전화가설을 종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인천에 본사를 둔 세창양행은 인천과 강원도 금성 탄광을 잇는 전화선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해에는 한성 인천 개성 등 세 군데에 공중전화도 설치됐다. 사용료는 매 5분에 50전이고 공중전화 바로 옆에는 전화소의 장리가 앉아있어 통화내용을 들었다.

우리 정부가 개설한 전화의 회선은 20선에 불과했지만 사용량이 급증해 1903년 한해 동안 통화건수가 무려 8천400여건에 달할 만큼 이용이 급증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시내전화보다는 시외전화가 먼저 개통됐는데, 이는 전화를 설치할 만한 상류계층은 대개 가까운 거리에 소식을 전할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오직 먼거리를 연결해 주는 통신수단이 필요했다. 요금도 시내와 시외가 차등이 없었다.

한편 일본에 선수를 뺏긴 청나라는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가지 제안을 한다. 조대비의 능인 수릉(서울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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