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전보가 가뭄바람 몰고 다닌다?
통신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급속히 발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망은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9월 28일 (음 8월 20일), 인천-서울간에 개통됐다. 인천지역의 전신망 설치를 위한 일본과 청국의 주도권 다툼은 결국 청국에 돌아간다.
청국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의주전선합동조약'을 체결하고 인천-서울-평양-의주를 잇는 일명 서로전선(西路電線) 부설권과 독점운영권을 획득한다.
1885년 8월 청국은 우리 정부와 합작으로 150명의 기술자를 동원해 인천을 시작으로 가설공사에 들어갔다. 기술진에는 2명의 덴마크기술자도 참여했다고 한다.
착공 10여일 만인 8월 14일에 인천지역 내 가설작업을 끝내고 부평 양주를 거쳐 8월 19일에 1차로 인천-서울간 공사를 마쳤다. 이때 경인간의 선로는 시흥을 거쳐 서강을 건너는 길과 양주를 거쳐 양화진을 지나는 두가지 경로가 검토되었는데 결국 거리가 짧은 양화진쪽으로 결정됐다. 이 경로는 우연하게도 지금의 경인고속도로 코스와 거의 흡사하다.
인천-서울간 공사를 마친 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던 당시 사역원 건물에 한성전보총국이 개국됐고 인천에는 중구 관동에 인천분국이 개설됐다. 인천과 서울을 이은 전신선은 계속 북서쪽을 향해 나갔다. 고양, 파주, 개성, 황주, 평양, 숙천, 정주를 거쳐 10월 6일, 마침내 천삼백리의 대장정 끝에 의주에 다다랐다. 이때 소요된 전주수는 6천248주였다. 이 서로전선은 중국의 천진-상해로 이어지면서 청국은 물론 세계 각국과 전신에 의한 통신이 가능하게 됐다.
새로운 문명이기인 전신이 가설됐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일부 계층에 한정됐다. 전보가 한문이나 영문으로 전달됐고 요금도 비쌌기 때문에 청국인 등 외국인이나 고위관리 혹은 일부 양반들이 주로 사신으로만 사용했다. 일반 백성들은 전신전보 사용을 철저하게 피했다. 무엇보다 예의를 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때 인천세관에 근무하는 한 주사가 득남을 한 후 서울에 사는 할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보로 전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할아버지는 평생 손자의 문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전보에 대한 유언비어도 돌았다. 전보가 전달되는 도중에 전선을 지키는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내용이 변조된다거나 전보는 전기바람에 의해 전해지는데 전기바람은 가뭄을 몰아오는 까닭에 전보가 날아들면 그 지역에 가뭄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전보를 취급하는 전보사에 전기귀신이 살고 있다거나 전신선을 통해 전염병이 옮겨다닌다는 소문이 돌곤했다.
인천지역의 전신망은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에게 넘어간다. 일본군은 불법으로 인천-서울간 은 물론 서울-부산간(남로전선) 및 서울-원산간 (북로전선)도 강점해 군용전선을 가설한다.
우리 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인천-서울간 전선 복구작업에 나섰고 일본은 1896년 서로전선과 북로전선을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1885년 한성전보총국이 개설된 지 10여년만의 일이다. 한편 우리나라 무선통신의 첫 전파는 월미도에서 전송됐다. 강희 4년(1910년) 9월 구한국 정부는 월미도 산 정상에 무선전신소를
- 첨부파일
-
- 다음글
- 철도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