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철도이야기
"화륜거(火輪車)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899년 9월 18일 제물포-노량진 간 33.2㎞의 철로 위를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나무로 만든 객차 3량을 매달고 달리던 모갈형 기관차의 모습을 그린 9월 19일자 독립신문의 내용이다.
이 땅에 기차가 달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화가 하나 있다. 1889년 당시 주미공사로 있던 이하영(후에 외부대신을 지내고 퇴관 후 인천 율목동에 거주)은 귀국하면서 희귀한 물건을 하나 갖고 들어왔다. 그 물건을 고종 앞에 펼쳐 놓았다. 폭이 여섯치요, 높이가 여덟치가 되는 모형 쇠수레(鐵車)였다.
그는 두 개의 쇠길을 연결하여 그 위에 쇠수레를 얹어 놓았다. 모두들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어 이하영이 쇠수레의 태엽을 감자 이 쇠수레는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종과 대신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뒷걸음 쳤다고 전한다. 잠시 후 비교적 개화 문물에 대범했던 고종은 손수 태엽을 감아 시동도 해보고 이하영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 후에 경인철도에 장난감 쇠수레와 비슷한 철마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종착역은 인천여상 부근
기공식은 1897년 3월 22일 월요일 9시 정각 제물포항에서 2마일(3.2㎞) 떨어진 우각현(쇠뿔고개·현 도원 고개 근방)에서 정부관리 겸 철도관리관인 이채연을 비롯해 미국인 알렌 박사, 인천에 진출해 있던 미국 무역상사 타운센트의 드쉴러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알렌 박사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해 부설권을 따게끔 힘을 서준 것으로 알려져 있고 드쉴러는 모오스가 부설권을 딴 후 회사를 차릴 때 자금을 대준 인물이다.
경인철도는 처음에 미국인 모오스(Morse)가 한국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어 착공했으나 공사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애를 먹었다. 결국 1백만 달러를 받고 철도를 대륙침탈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인의 손에 삽자루를 넘겼다.
그런데 처음 노선 계획은 지금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숭의동 옛 전도관(현 예루살렘교회) 자리에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렌 박사의 별장이 있는 관계로 우각역(지금의 박문여고 앞) 을 개설했고 거기서 독갑다리(숭의로터리 서쪽부근)를 거쳐 만조시에 바닷물이 들어오던 지금의 사동 인천여상 남쪽에 종착역인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장차 구축될 축항과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곳 철도부지에 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이 땅을 내놓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려 당시까지 만해도 부설권을 갖고 있던 모오스는 애간장을 끓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독일계 상사 세창양행을 운영하던 카알 월터였다. 그는 당시 자신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거의 쓸모가 없던 응봉산(자유공원) 북서쪽 일대의 땅을 철도부지로 선뜻 내놨다.
우여곡절 끝에 경인선 노선은 우각역을 거쳐 채미전 거리(지금의 청과물 시장)에 있던 축현역을 지나서 응봉산을 휘어감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우각역은 알렌박사가 한국을 떠난 후 1906년 4월에 폐지됐고 축현역은 1908년 12월에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이전된 후 1926년 4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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