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월미도로 썬탠하러 가자
달의 꼬리를 닮은 그 섬은 '월미도(月尾島)'라는 상형문자를 얻는다.
세월 따라 월미도는 달처럼 기울기도 하고 차기도 했다. 월미도가 차기 시작한 때는 구한말 1891년 일본이 월미도에 해군 저탄장과 선박 급수소를 설치하면서 부터다.
1896년에는 러시아도 이곳에 석탄창고를 두었다. 1902년에 일본해군은 월미산 꼭대기에 무선국 등 병참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섬을 일주할 수 있는 도로를 닦는다.
4㎞ 가량 되는 섬 둘레에 벚꽃과 단풍나무를 심어 봄 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벚꽃놀이와 단풍놀이를 하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월미도로 들어갔다. 1904년에는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인천역에서 소월미도까지 철도를 가설하기도 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면서 목교 위를 달리는 모습을 담은 빛 바랜 몇 장의 사진만이 그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월미도가 섬으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잃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둑길이 조성되면서 부터다. 현재의 대한제분 앞에서부터 월미도까지 약 1㎞ 길이, 넓이 2차선의 둑길이 놓여지자 월미도는 섬이 아닌 '반도'로 변했다. 둑길은 돌로 쌓아서 만든 아스팔트길이었는데 도로 양쪽에 약 3m 간격으로 돌기둥과 쇠사슬을 연결했다. 백중사리 때는 바닷물이 다리 위를 찰랑찰랑 넘쳐 나기도 했다. 이 다리는 월미도를 병참기지에서 행락지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철마다 많은 행락객들이 월미도로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달이 꽉 차기 시작한 것이다. 철도국은 철도 여객수입을 늘리기 위해 월미도에 위락시설들을 속속 세우고 일종의 '관광열차'를 운행했다. 모래를 퍼다 부어 인공 백사장을 조성하고 풀장을 만들었다. 또한 섬 북쪽 끝머리에는 바닷물을 끓여 사용하는 공동목욕탕식인 조탕(潮湯)을 개장했다. 오늘날 해수탕의 원조격이다. 이밖에 동 식물원과 수족관 그리고 캠핑을 할 수 있는 야영지 등을 갖춰 명실공히 종합임해유원지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의 해수욕장으로서는 모래사장 외엔 부대시설이 거의 없던 원산의 송도원과 부산의 해운대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월미도의 시설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얼마 후 이 시설들은 철도국에서 민간업체로 넘어가는데 이 업체는 풀장 시설을 더 확충하고 한술 더 떠 용궁각(龍宮閣)이라는 요정까지 신설한다. 용궁각은 바닷물이 차면 해상에 떠있게 되는 일종의 수상(水上)가옥으로 월미도 앞바다 물위에 비친 야경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둥글게 생긴 큰방에는 일본인 따로 한국인 따로 앉아 술을 마시며 즐겼다. 가끔 용동 권번(券番 일종의 기생 양성소)에 속해 있는 기생들을 데려와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용궁각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했고 기념품가게도 줄지어 있어 하나의 유원지 타운을 형성했다.
특히 1935년 무렵에는 해변가에 3층 목조건물로 지어진 빈(濱) 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명성은 온 장안에 퍼졌다. 때마침 불어닥친 전시호황으로 인해 인천사람들은 물론 경향각지에서 몰려오는 행락객들로 경인열차는 늘 만원이었다.
셔틀버스라고 할 수 있는 승합자동차가 지금의 중앙동에서 인천역을 거쳐 조탕 앞까지 사람들을 연신 실어 날랐다. 월미도는 해방을 맞으면서 급격히 퇴락하기 시작한다. 유원지 경영이 시원치 않아 몇몇 유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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