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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학방'과 여자기술학교가 설립 토대
1903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박문학교의 학생모집 광고이다. 인천항사립박문학교는 1900년 9월 1일 가톨릭 신자였던 김교원과 강준에 의해 문을 열었다.
개교 이전부터 인천 본당(답동성당) 내에 있던 서당식 학교 '천주학방'이 그 모태가 되었다. 박문학교의 명칭은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이자 인천지회 격이었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다. 독립협회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인천 땅에서 전개된 인천박문협회의 독립자강 사상의 발로로서 영어학교가 설립되었다. 야간 영어학교는 꽤 인기가 있었다.
박문학교에서 졸업한 6~7명의 학생들은 당시 인천에 진출해 있던 외국상사나 해관(海關)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다루기도 했다.
개교 당시 박문학교의 학생수는 10명 남짓에 불과했으나 1904년 에우제니오 드뇌(Eugene Deneux·한국명 전학준) 신부가 인천 본당의 4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고 교장직을 맡게 되면서 학교로서의 기틀을 잡아간다. 이 시기에 박문학교를 다닌 학생으로는 후에 제2공화국의 총리가 된 장면 박사와 서예의 대가 박세림 씨가 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설립한 여자기술학교도 박문학교 설립의 토대가 된 학교이다. 당시만해도 한국의 관습상 처녀들은 거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여자기술학교는 1899년 8월, 30여명 정도의 여학생을 모집하여 읽기, 쓰기와 함께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1917년 4월 1일, 이 학교는 인천항 사립박문학교 남자부와 통합되는데 이때부터 학교명이 '인천사립박문학교'로 바뀐다. 남녀부의 통합 이후 학생수는 1917년 240명, 1918년 222명, 1919년 211명으로 점차 줄어든다.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과 가정의 빈궁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아이들은 12세 정도만 되면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담배·성냥·초 공장 등에 나가거나 밥 한 사발을 얻어먹기 위해 일본인 집에 심부름꾼이나 보모로 들어갔다.
때문에 개교 초기에는 학생들이 떨어져 나갈까봐 수업료를 한푼도 요구하지 못했고 비로소 몇 년 지나서 월 5전, 또 몇 년 후에 10전을 월사금으로 받았다. 지역사회에서는 이렇듯 부족한 학교 재정을 돕기 위해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1924년 상공인들의 단체인 보인계(輔仁稽)에서는 박문학교에 1백원을 기부했고 제물포청년회에서는 '교육대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南岡) 이승훈 선생도 강연회 연사로 참석한 기록이 있다. 지역사회의 뜨거운 열기에 힘입어 박문학교는 1925년 6월 2층 짜리 양옥의 남자부 교사를 신축했고 이어 11월에는 여학교 교사도 축성했다.
학생수도 다시 늘기 시작해 1923년경에는 남학생 184명, 여학생 345명이 되었다. 해마다 10월에는 전동 공설운동장(웃터골·현 제물포고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이날은 인천부민들이 몰려와서 함께 즐겼다고 한다. 1925년 11월 25일, 그때까지만 해도 4년제였던 인천사립박문학교는 <개정 조선교육령>에 의해 6년제 인천박문보통학교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일제의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 보통학교가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바뀜에 따라 학교명이 다시 인천박문심상학교로 개명하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박문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다니면서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평양이나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1939년에는 개성박물관을 찾아 인천 출신의 저명한 고고사학자이자 개성박물관장인 고유섭 선생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4월 4일 조선총독부는 미군의 B29 폭격에 대비한다는 미명하에 소개령(疏開令)을 발표하는데 박문학교의 남자부 건물이 소개공지대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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