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대포소리 울려야 밥먹는다?
2001-05-21 1998년 7월호
'꽝' '꽝' '꽈앙---'
응봉산(鷹峰山)에서 쏜 대포굉음이 인천시내에 울려퍼진다. 갑자기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한다. 대포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낮 12시. 바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대포소리로 점심시간을 알려 준 곳은 바로 인천관측소(현 인천기상대). 그곳은 원래의 업무인 기상관측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시보(時報)를 알리는,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았다. 해방 전 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관측소에서 매일 정오에 울리는 대포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 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이 잘 맞지 않기 때문에 대포소리에 맞춰 시계바늘을 돌려놓는 것이 일이었다.
1908년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단은 인천관측소에 시민에게 시보를 알리는 권한을 위촉하였다. 관측소는 시민들이 쉽게 시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는 고심 끝에 '포성(砲聲)'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관측소 측은 관측소 남쪽에 구식대포를 설치하고 정오시각을 알리는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꽝' '꽝' '꽈앙---'. 대포소리가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은 외쳤다. '밥먹고 합시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유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응봉산(일명 응암산)을 정오에 대포를 쏜다해서 흔히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관측소가 이미 94년 전에 세워진 고장이다. 러 일 전쟁 때 군사적으로 기상의 중요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은 인천 부산 원산항구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특히 개항 당시 인천은 교통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최초로 측우소가 설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904년 3월, 현 중구청 뒷길 송학동 길가에 있던 수진여관에서 처음으로 기상사무소를 개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1월에 현재의 중구 전동 25번지, 자유공원 북쪽의 제물포고등학교 뒷편에 건물을 짓고 통감부 관측소로 새 출발했다. 초대 소장에는 일본의 중앙기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의 권위자 와다박사가 부임했다. 그만큼 인천측우소의 위상은 막강했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국내 13개 도시에 있는 측우소는 물론 만주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하였다. 또한 일본 기상대와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 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
그후 1910년 8월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확장한 후 39년 조선총독부 기상대로 개칭했다가 해방 후 중앙관상대로 새롭게 발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기상관측의 중요한 시설이 대부분 훼손되어 정상적인 기상업무가 어려워지자 안타깝게도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는 서울로 이전되었다. 인천은 단지 지역측우소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기상대는 오늘도 북위 37.28˚ 동경 126.38˚좌표에 둥지를 틀고 응봉산 마루턱 푸른 숲 사이에서 하얀 원통형 건물의 자태를 뽐내며 한 세기를 변함없이 서해바다와 인천시내를 굽어 보고 있다.
응봉산(鷹峰山)에서 쏜 대포굉음이 인천시내에 울려퍼진다. 갑자기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들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한다. 대포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낮 12시. 바로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대포소리로 점심시간을 알려 준 곳은 바로 인천관측소(현 인천기상대). 그곳은 원래의 업무인 기상관측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시보(時報)를 알리는,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았다. 해방 전 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관측소에서 매일 정오에 울리는 대포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 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이 잘 맞지 않기 때문에 대포소리에 맞춰 시계바늘을 돌려놓는 것이 일이었다.
1908년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단은 인천관측소에 시민에게 시보를 알리는 권한을 위촉하였다. 관측소는 시민들이 쉽게 시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는 고심 끝에 '포성(砲聲)'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관측소 측은 관측소 남쪽에 구식대포를 설치하고 정오시각을 알리는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꽝' '꽝' '꽈앙---'. 대포소리가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은 외쳤다. '밥먹고 합시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유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응봉산(일명 응암산)을 정오에 대포를 쏜다해서 흔히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관측소가 이미 94년 전에 세워진 고장이다. 러 일 전쟁 때 군사적으로 기상의 중요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은 인천 부산 원산항구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특히 개항 당시 인천은 교통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외교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최초로 측우소가 설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904년 3월, 현 중구청 뒷길 송학동 길가에 있던 수진여관에서 처음으로 기상사무소를 개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1월에 현재의 중구 전동 25번지, 자유공원 북쪽의 제물포고등학교 뒷편에 건물을 짓고 통감부 관측소로 새 출발했다. 초대 소장에는 일본의 중앙기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의 권위자 와다박사가 부임했다. 그만큼 인천측우소의 위상은 막강했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국내 13개 도시에 있는 측우소는 물론 만주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하였다. 또한 일본 기상대와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 받을 만큼 보유기술도 뛰어났다.
그후 1910년 8월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확장한 후 39년 조선총독부 기상대로 개칭했다가 해방 후 중앙관상대로 새롭게 발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기상관측의 중요한 시설이 대부분 훼손되어 정상적인 기상업무가 어려워지자 안타깝게도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는 서울로 이전되었다. 인천은 단지 지역측우소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기상대는 오늘도 북위 37.28˚ 동경 126.38˚좌표에 둥지를 틀고 응봉산 마루턱 푸른 숲 사이에서 하얀 원통형 건물의 자태를 뽐내며 한 세기를 변함없이 서해바다와 인천시내를 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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