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쟁기 던진 농부들, 낚시대 꺽은 어부들 일확천금 꿈꾸며 '꾸역꾸역'
2001-05-19 1998년 5월호
미두취인소는 보통 미두장(米豆場)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곡물을 중개하고 거래하는 선물(先物)시장 역할을 했다.
미두장은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상인들이 1896년 미곡의 품질개선과 쌀값의 적정화 표준화를 위해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원래 목적은 일제의 쌀 수탈이었다.
미두장은 우리나라 관공서의 허가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들 멋대로 인천에 주재한 대리영사가 인가하고 일본조계 내에 설립했다.
초기에는 쌀과 콩 뿐만 아니라 석유, 명태, 방적사, 광목, 목면 등을 거래했다. 경기도와 황해도는 물론이고 충정도, 경상도에서 올라 온 쌀들이 인천항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천미두장의 하루 거래량은 많은 날에는 100만석을 넘었고 적은 날에도 2~30만석은 족히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인된 인천미두장은 한때 그 실적이 일본 최대의 미두장인 오사카 도지마거래소보다도 컸다고 한다.
쌀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여자가 꾀기 마련. 그 당시 용동과 싸리재 그리고 터진개 (현 신포동) 일대에는 화월관(花月館)이나 용금루(湧金樓) 같은 일류 요리집들이 즐비했다. 또한 용동에는 기생소개소까지 생겨 기생집에는 미두꾼들의 발걸음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천의 미두왕' 반복창(潘福昌). 그는 인천미두장을 얘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로 쌀과 함께 흥망성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곡물중매점에서 근무하면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20년 초 미두장에 뛰어들어 3백만원의 거금을 거둬들였다.
그는 지금의 신신예식장 자리를 구입해서 돌축대를 쌓고 3백평이 넘는 저택의 터를 닦았다. '화동(花洞)자켓'이라고 불리던 멋쟁이 신여성과 조선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는데 결혼식날 경인선 열차를 통째로 대절할 만큼 그는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쌀의 시세폭락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고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렇듯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이 많아지면서 날이 갈수록 미두장의 폐해는 날로 심각해졌다. 미두장 원래의 기능은 점점 퇴색하고 '돈놓고 돈먹기 식'의 투기장으로 변해갔다.
미두장의 거래방식은 현물(쌀)거래가 아닌 기한부 선물(先物)거래였다. 즉 보증금만 있으면 많은 양의 쌀을 확보했다가 적당한 시기에 팔아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유혹에 쉽게 빠졌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은 한국인 지주나 부호들이 일본인 미두꾼의 유혹과 바람잡이의 선동에 넘어가 전 재산을 걸고 투기한 끝에 폐가망신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무렵에 창간된 《개벽》지는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으로 인천의 미두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처음 경기(京畿) 좌우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점차 삼남(三南) 각지의 쌀을 긁어들이는 판에 어찌하다가 한번 천행(天幸)으로 장님낚시에 물리는 고기와 같이 항하사(恒河沙)의 일립(一粒) 만치라도 먹었다하면 이때가 일확천금의 천재일시(千載一時)라 하여 농부는 괭이를 던지고 상고(商賈)는 주판을 버리고 어부는 낚시대를 꺾고 너도나도 덤비다가 밑천까지 잘리게 된 결과는 전당질로, 전당질은 영원방매(永遠放賣)로 마침내 귀신도 모르게 조상의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산하여도 어느 누가 말 한마디 불쌍하다고 않는 것이 미두쟁이 노름이다"
한편 인천의 상인들은 일본상인 중심의 인천미두장이 잠시 해산상태에 있을
미두장은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상인들이 1896년 미곡의 품질개선과 쌀값의 적정화 표준화를 위해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원래 목적은 일제의 쌀 수탈이었다.
미두장은 우리나라 관공서의 허가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들 멋대로 인천에 주재한 대리영사가 인가하고 일본조계 내에 설립했다.
초기에는 쌀과 콩 뿐만 아니라 석유, 명태, 방적사, 광목, 목면 등을 거래했다. 경기도와 황해도는 물론이고 충정도, 경상도에서 올라 온 쌀들이 인천항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천미두장의 하루 거래량은 많은 날에는 100만석을 넘었고 적은 날에도 2~30만석은 족히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인된 인천미두장은 한때 그 실적이 일본 최대의 미두장인 오사카 도지마거래소보다도 컸다고 한다.
쌀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여자가 꾀기 마련. 그 당시 용동과 싸리재 그리고 터진개 (현 신포동) 일대에는 화월관(花月館)이나 용금루(湧金樓) 같은 일류 요리집들이 즐비했다. 또한 용동에는 기생소개소까지 생겨 기생집에는 미두꾼들의 발걸음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천의 미두왕' 반복창(潘福昌). 그는 인천미두장을 얘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로 쌀과 함께 흥망성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곡물중매점에서 근무하면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20년 초 미두장에 뛰어들어 3백만원의 거금을 거둬들였다.
그는 지금의 신신예식장 자리를 구입해서 돌축대를 쌓고 3백평이 넘는 저택의 터를 닦았다. '화동(花洞)자켓'이라고 불리던 멋쟁이 신여성과 조선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는데 결혼식날 경인선 열차를 통째로 대절할 만큼 그는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쌀의 시세폭락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고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렇듯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이 많아지면서 날이 갈수록 미두장의 폐해는 날로 심각해졌다. 미두장 원래의 기능은 점점 퇴색하고 '돈놓고 돈먹기 식'의 투기장으로 변해갔다.
미두장의 거래방식은 현물(쌀)거래가 아닌 기한부 선물(先物)거래였다. 즉 보증금만 있으면 많은 양의 쌀을 확보했다가 적당한 시기에 팔아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유혹에 쉽게 빠졌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은 한국인 지주나 부호들이 일본인 미두꾼의 유혹과 바람잡이의 선동에 넘어가 전 재산을 걸고 투기한 끝에 폐가망신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무렵에 창간된 《개벽》지는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으로 인천의 미두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처음 경기(京畿) 좌우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점차 삼남(三南) 각지의 쌀을 긁어들이는 판에 어찌하다가 한번 천행(天幸)으로 장님낚시에 물리는 고기와 같이 항하사(恒河沙)의 일립(一粒) 만치라도 먹었다하면 이때가 일확천금의 천재일시(千載一時)라 하여 농부는 괭이를 던지고 상고(商賈)는 주판을 버리고 어부는 낚시대를 꺾고 너도나도 덤비다가 밑천까지 잘리게 된 결과는 전당질로, 전당질은 영원방매(永遠放賣)로 마침내 귀신도 모르게 조상의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산하여도 어느 누가 말 한마디 불쌍하다고 않는 것이 미두쟁이 노름이다"
한편 인천의 상인들은 일본상인 중심의 인천미두장이 잠시 해산상태에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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