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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격동기 역사 외롭게 지켜 본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2001-05-21 2000년 11월호

1902년 탁지부 산하에 해관등대국을 두고 팔미도 등대를 설치하기 시작해 해방 전 까지 우리나라 섬과 해안에 3백여기를 세웠다. 그 등대들은 원래 일본의 군사목적으로 세워진 탓에 태평양전쟁 때 상당수 파괴됐다. 일본은 러일전쟁 1년 전인 1903년 프랑스 회사의 기술을 이용하여 착공 1년 1개월만에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혔다.

해발 71m 섬 꼭대기에 세워진 높이 7.9m 짜리 이 등대는 처음엔 90촉광 짜리 석유등을 사용했다. 당시에 어부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꼭대기에서 밤새 깜박거리는 불빛을 도깨비불이라고 했다고 한다. 팔미도 등대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불을 밝히며 우리나라 격동기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삼키는데 결정적인 디딤돌이 됐던 러일전쟁이 팔미도 앞바다에서 발발했다. 1904년 2월 8일 오후 4시경 일본함대는 인천 앞 바다에서 여순으로 향하던 러시아 순양함 카레치호와 바랴크호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러시아 함정은 함포사격으로 즉각 응전했으나 바닷속의 물고기만 놀랬을 뿐 한 발도 일본 군함을 맞추지 못했다.

러시아 함대는 항복하기보다는 자폭을 택해 오후 5시경에 바다 속으로 수장되고 만다. 인근 영국군함에 긴급 피난했던 바랴크호 군악대는 서서히 가라앉는 그들의 배를 바라보며 울면서 러시아 국가를 연주했다고 당시 런던 특파원이 보도하고 있다. 폭발 할 때 책, 요리도구, 옷가지 등 파편들이 하늘로 치솟아 인천 시내까지 날아들어 사람들이 주워가기도 했다고 한다.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거류민들은 이듬해인 1905년부터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2월 9일을 '인천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팔미도 등대는 6.25 당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길잡이 역할을 했다. 50년 8월, 비밀부대 KLO(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대원들에게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라는 극비명령이 하달되었다. 9월 10일 밤, 대원 25명은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닷새 동안 KLO 대원과 북한군 사이에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인천 상륙작전 D데이인 9월 15일 새벽 2시 20분 드디어 팔미도 등대에 불이 환히 밝혀졌다. 이를 신호로 7개국 연합군 2백 61척의 함대는 인천항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등대 옆에는 KLO 8240부대의 6.25 참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팔미도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산 372로 인천에서 바닷길로 13㎞ 정도 떨어진 섬이다. 면적 2만3천평에 해안선 길이가 1.4㎞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으로 2~ 3백년된 아름드리 소나무와 무궁화나무가 섬 전체를 덮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등대에 올라서면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 그리고 LNG인수기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강화도 마니산도 손에 잡힐 듯하다.

현재 팔미도에는 해상관측을 위한 군부대와 3명의 등대지기들이 있다. 인천시는 팔미도를 시민들의 품에 돌려주기 위해 팔미도를 개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난 한 세기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팔미도 정상에서 의연하게 불을 밝혀 온 등대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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